1.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할 때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된 장소들을 두루 찾아가 보고자 했으나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탓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도 가보지 못했고, 그의 무덤이 있다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도 다녀오지를 못 했다. 그러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대체 뭘 하고 다녔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내 딴에는 <죄와 벌>의 무대가 되는 곳들을 직접 답사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네프스키 대로변에 있는 카잔 성당 옆의 그리보예도프 운하서부터 걸어가 보기로 했다. 거기서 걸어가면 어디쯤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가 살았던 아파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던 게,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작품 속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센나야 광장이 있고, 역시 그쪽을 향해 소설에 등장하는 사도바야 거리가 나있어서 대충 찾다 보면 나올 줄 알았다.
라스코리니코프의 아파트는 결국 못 찾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행인들에게 그의 아파트를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내가 얻은 정보가 정확하지도 않고,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이 초면에는 다소 퉁명스럽고, 영어를 안 하는지 못 하는지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인근의 거리에서 작품의 아우라(?)를 느껴 보려고 애만 썼다. 내가 여행한 계절은 7월 백야 시기였다.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시기가 바로 이 때다. “덥고 찌는 여름밤 11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밤다운 밤이 없는 페테르부르크”라는 구절이 작품 속에서 등장한다.
센나야 광장으로 가는 골목의 집들은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삼, 사층의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들이다. 우중충한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마치 전당포가 있을 것 같았고, 어디에선가 라스코리니코프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운하 둑 위의 집에서는 창녀 소냐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문간에 서 있을 것 같았다.
센나야 광장은 <죄와 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다. 소설 마지막에는 소냐의 권유로 자수 직전 라스코리니코프가 이곳으로 와서 엎드려 입을 맞춘다. 그러나 광장에는 이를 알리는 어떠한 표지도 없었다. 단지 소설과 비슷하게 노점상들이 떠들썩하게 늘어서 있어 체리와 복숭아를 사들고 돌아왔을 뿐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모스크바의 ‘글라주노프 미술관’에서 그림을 통해서나마 그를 만났다. 일리야 글라주노프는 현대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그림들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등장하는 죽은 소년의 그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세 살 나이로 죽은 막내아들이 있었다. 사망 원인은 아버지한테서 이어받은 간질병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간질병 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막내를 유난히 사랑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신부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러한 체험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전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격인 알료샤는 그의 죽은 아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2.
여행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제대로 만나보고 오지도 못했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신앙심 가득한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반대로 냉담한 무신론자가 있고, 때로는 본능에 충실한 열정적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서로 간에 팽팽하게 대결한다.
식민지 시대 우리 작가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간혹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중 이상은 자신의 유언장같이 쓴 소설 <종생기>(1937)에서 아주 스쳐가듯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하고 있다.
“… 이 의뭉스러운 어른(도스토예프스키)은 오직 아름다운 문장을 쓸 듯 쓸 듯, 절승경개가 나올 듯 나올 듯 해 만 보이고 끝끝내 아주 활짝 꼬랑지를 내보이지는 않고 그만둔 구렁이 같은 분이라.”
도스토예프스키를 의뭉스럽고 구렁이 같은 분이라고 한 것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르겠다. 단 도스토예프스키가 작품 속 인물 대부분의 삶을 종결시키지 않고 수수께끼같이 끝내는 건 맞다. 도스토예프스키 전문 연구자인 바흐친은 이렇게 말했다.
“존재와 삶에는 ‘개구멍’이 있어 작가가 주인공의 삶을 형상화하는 순간, 주인공은 그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버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속에서 인물의 삶을 단수적으로 종결시키지 않고 대화적으로 말을 건네며 복수성으로 열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