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수업 시절,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인 박두진 선생이 잡지 『문장』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던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요즘 그 얘기가 생각나서 다시 『문장』지를 톺아보았다. 시인으로 등단하는 과정이 요즘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만큼이나 재밌었다.
1939년에 창간된 『문장』은 이 시기 거의 유일한 순문학 잡지였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문학잡지는커녕 모든 잡지들이 폐간돼가던 시기였다. 잡지사에서 작품 모집 공고가 나왔을 때, 문청들이 앞 다퉈 응모를 했으리라 짐작된다.
시인 등단의 절차는 까다로웠다. 심사자는 정지용 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매달 1회 3편 이내의 시를 응모하고, 추천된 작품은 『문장』지에 게재된다. 그러나 한 번 추천됐다고 곧바로 시인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세 번의 추천을 받아야 기성작가로 대우를 받는다.
창간호인 1월호에 모집 광고가 실렸는데, 3월호에 제일 먼저 조지훈의 「고풍의상」이 추천된다. 이 시는 후일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이 곡을 붙인 시이기도 하다. 조지훈은 이 시로 추천을 받기는 했으나 정지용의 심사평은 마치 낙선작을 평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미인화를 그리시려면 김은호 화백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마도 시를 그림과 같이 꾸민 것이 눈에 거슬렸나 보다. 정지용은 조지훈의 시가 생활과 동떨어져 있고 장황하며 경험이 아직은 부족함을 지적하며 정진할 것을 권한다.
조지훈은 추천이 된 기쁨도 잠깐이고 다시 새로운 다짐을 해야 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박두진이 수업 시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아마 박두진도 조지훈과 마찬가지로 『문장』 지에 응모를 했으리라.
박두진은 기대 속에 종로의 책방을 둘렀다. 잡지를 펼치니 자기 이름은 안 보였다. 순간 그리도 창피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마치 ‘너! 문장지에 응모했다가 떨어졌지?’라며 흉을 보는 것 같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전차도 못 타고 골목길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박두진은 그러나 두 달 후인 5월호에 「향현」과 「묘지송」 두 편이 추천 게재된다. 조지훈보다 한발 늦었으나 심사평은 꽤 괜찮았다. 정지용은 박두진의 시를 자신의 시우(詩友)인 김소운에게 자랑삼아 보여줬다고 한다.
김소운은 박두진의 시를 보더니 자신이 쓰려고 계획했던 산(山)에 대한 시를 포기해야겠다고 말했단다. 정지용은 박두진의 유유히 펴고 앉은 시의 자세가 매우 편하게 보인다고 했다. 후일 정지용이 박두진을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정지용: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요?
박두진: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매일 저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정지용: 분명 종교를 가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에 그것이 노출되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러나 박두진 역시 두 번째 추천 때는 냉엄한 평가를 받는다. 정지용은 어떤 이의 시를 한번 추천한 후 염려되는 것은 이 사람이 뒤를 잘 대일까 하는 점이라고 운을 띄운다. 둘째 번에 허둥지둥하는 꼴이 원 이럴 수가 있는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박두진의 첫 번째 추천 시는 거의 완벽을 기했으나, 이번 것은 그렇지 못하며 시상(詩想)도 낡았다고 비판한다. ‘고루청풍(高樓淸風)에 유려한 변설’이라는 자신의 장점을 고집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최종 코스를 위해 맹렬히 저항하시오!’라고 채찍을 가한다.
이때 박목월도 처음으로 추천되는데 그 역시 무시무시한(?) 평가를 받는다. 모름지기 시인은 강해야 하는데 목월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다음에도 그러면 몽둥이로 후려갈기겠다고 한다. 아마도 목월의 달달한 리리시즘이 마땅치 않은 듯싶었나 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박두진의 추천이 가장 먼저 완료된다. 정지용은 박두진의 시적 체취는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이라고 평한다. 시 속에서 새의 울음도 기괴한 외래어를 섞지 않은 인간과 친밀한 자연어가 됐다며,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이 등장했다고 평한다.
박두진은 「묘지송」에 나오는 새 울음소리 “삐이삐이 배, 뱃쫑! 뱃쫑!”이라는 표현을 얻기 위해 어느 날 멀리 양평 양수리까지 가서 하루 종일 묘에 드러누워 새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한다.
조지훈은 「승무」‧「봉황수」 등의 작품이 추천되면서 박두진 다음으로 추천이 완료된다. 정지용은 조지훈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추천이 됐음에도, 그 완료는 열한 달 만에 됐으니 지금껏 잘 견디고 참았다면서 다소 미안해한다.
그러나 정지용은, 자신의 못난 시어미 노릇으로 시는 더 빛나게 됐다고 하며, 조지훈을 시단에 새롭게 나타난 “신고전‘이라 소개한다. 글 마지막에는 심사자 자신도 얼마나 신났는지 "브라보!"라고 외친다.
박목월 역시 꼬박 일 년을 기다려 추천이 완료된다. 정지용은 북에 김소월이 있었는데, 이제 남에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면서 목월을 소월에 비교한다. 정지용은 그러나 목월이 소월과 달리 민요에 머뭇거리지 말고 시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정지용에게 시인으로 추천된 이들 세 명은 해방 후 함께 합동시집 『청록집』을 낸다. ‘청록’이라는 이름은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의 ‘백록’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들은 ‘청록파’라는 이름으로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나름의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정지용은 월북인지 납북인지, 또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모르는 불분명한 상태에서 한때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이 사라져 있었다. 박두진은 정지용을 얘기할 때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우리 현대시사에서 리듬은 영랑, 언어는 지용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고 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