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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모마 미술관에서, 「아비뇽의 처녀들」과 「개살구」

by 양문규

1.

지하철에서 내려 뉴욕의 현대미술관, 일명 모마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는 뉴욕시티센터 건물이 있다. 사라센 양식의 이 건물은 벽면 역시 사라센 양식의 타일로 장식돼 있었다. 뉴욕의 다문화 모더니티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티스트 작가였던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조형상도 서있었다. 정작 모마 건물에 이르니, 모마는 대도시 도로에 맞닿은 여느 백화점처럼, 길가 한복판 빌딩들 틈에 천연덕스럽게 끼어 있었다. 자유분방한 예술의 도시 뉴욕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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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3_154141.jpg 사라센 양식의 뉴욕 시티 센터(상), 조형상 LOVE(중), 모마 내부에서 본 뉴욕


모마는 미술관 이름이 ‘현대’ 미술관인 만치,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에 걸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5층에는 1880~1940년의 작품을, 4층에는 1940~1970년대 작품이 전시돼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익숙한 모네, 고흐, 피카소, 마티스 등의 그림은 5층에서 볼 수 있다.


5층 그림들 중에서도 모마가 자랑하는 컬렉션 중의 하나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입체파의 화가로 등장하게 됐음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현대 미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나 같은 문외한은 피카소 그림 앞에 서면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의 그림은 애초 난해한 그림이려니 생각하고, 그러나 유명하다고 얘기하니 한 번 더 쳐다보고 넘어가는 정도이다. 이 그림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이 그림에서 기억에 남았던 점은, 벌거벗은 여인들의 피부색이 붉은색 또는 분홍 색깔이었다는 점이다. 최근에 모마의 도슨트가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고 그 색깔과 연상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아비뇽의 창녀들」이라고 한다. 작품 배경은 피카소가 고향을 떠나 청년기 시절을 보냈던 바르셀로나의 아비뇽이다. 아비뇽은 바닷가를 낀 곳이다 보니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창가 골목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곳의 창녀들을 그림에 담은 것이다.


도슨트는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작품 중앙 아래쪽에 놓인 과일에서 찾는다. 나는 이 그림에 과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달콤한 과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고 썩는다. 너무나 짧은 달콤함이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과 닮은 면이 있다.


그 짧은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아비뇽 골목을 찾는 이들! 당시 이 골목에서 성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죽음과 맞바꾼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에 있었던 그림 속 여인들의 피부 색깔이 복숭아 내지는 살구 색깔이었던 것이 새삼 환기됐다. 그 색깔들은 성적 흥분을 자아내는 색이기도 한데, 이 대목에서 이효석의 단편소설 「개살구」를 떠올렸다.


IMG_0514 아비농의 처녀들, MOMA.JPG 아비뇽의 처녀들


2.

「개살구」(1937)의 주인공 김형태는 강원도 오대산에 땅을 가진 덕분에 벼락부자가 된다. 산에 채벌장이 들어서면서 박달나무 시세가 올라, 산에서 벤 나무를 우차에 실어 주문진 항구에 부려 놓으면 철로 공사가 있는 이웃 항구로 실어 나르는 덕에 ‘돈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형태는 번 돈으로 논도 사고 춘천서 학교를 나온 아들을 조합 서기로 올려놓는다. 그리곤 첩 놀음에 뛰어든다. 먼저 강릉서 첩을 데리고 오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한 해를 못 넘기고 도망을 친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멀리 서울까지 가서 미인 색시를 구해 온다.


형태는 강릉집 일도 있곤 해서 여자 단속을 철저히 해 집 근처에 외간 남자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나, 뜻밖에도 서울집은 아들과 눈이 맞는다. 형태는, 아들은 물푸레 나뭇가지로 몰매를 쳐 실신케 하고, 서울집은 사지를 결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 인두로 얼굴을 지진다.


이후 아들은 서울로 도망가고, 형태는 재산이나 늘릴 욕심으로 면장 운동에 몰두하며 분을 삭인다. 그러나 서울집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식지 않고 불꽃 같이 타오르며, 그럴 때마다 그녀를 잃는다면 ‘그까짓 면장은 해서 뭐 하랴’ 하는 허탈한 생각에 빠진다.


「개살구」의 무대는 “어금니에 군물을 돌게 하는” 개살구가 익어가는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그린다. 이는 마치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창녀들 밑에 놓인 과일이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설명을 생각나게 한다.


“하늘의 개가 붉은 달을 입에 넣고 게웠다 물었다 하다가 드디어 온전히 삼켜 버리는" 월식 날 밤 살구나무 밑에서 서울 집과 아들의 밀회가 이뤄진다. 「개살구」에서 보이는 원시적 분위기는 「아비뇽의 처녀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일층 부각한다.


3.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얘기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피카소의 행적을 보면, 그는 결혼을 두 번만 했지 평생 가깝게 지냈던 여성만 따져도 일곱 명에 이른다. 피카소는 욕망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이를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인가?


도덕 선생이나 윤리 선생은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라고 훈계한다. 그러나 절제된 욕망은 결코 욕망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라캉 식으로 얘기한다면 욕망이란 그 본질상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파시」(1964)라는 작품에서 욕망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금기를 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의 잔악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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