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벙어리 삼룡이」

by 양문규

1.

2019년 4월, 프랑스의 자랑이자 파리의 영혼이라 불리는 노트르담 성당이 화재로 불탔다. 내가 파리를 마지막으로 여행했던 때가 2015년 4월이니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여행할 당시만 해도 문화대국 프랑스에서 감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노트르담 성당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는, 『레미제라블』(1862)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노트르담 드 파리』(1831)를 읽으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위고는 화려한 필치와 함께 침이 마르도록 성당을 찬양해,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나가는데 방해를 받을 정도다.


성당1.jpg
장미창.jpg
야경.jpg 성당의 측면(위), 정면(가운데), 센 강에서 본 성당의 야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위고가 노트르담 성당을 예찬하면서 성당의 아름다움을, 이 소설의 주인공인 꼽추 카지모도의 추한 모습과 일체화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당은 그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고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소설 줄거리를 보면 카지모도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두 사람인 신부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 두 사람을 다 잃고, 끝내는 에스메랄다의 시신을 안고 자신도 죽는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노트르담의 종루, 첨탑 등 성당 곳곳의 장소에서 벌어진다.


성당엔 ‘가고일’이라 부르는 괴물 모양의 지붕 홈통 주둥이가 있다. 카지모도의 양부인 신부는 추락하다 두 팔로 죽을힘을 다해 거기에 매달리고, 카지모도는 성당 난간서 신부를 복수심에 가득 차 내려다본다. 노트르담 성당을 둘러보면서 이런 광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고일.jpg 신부가 매달린 지붕 홈통 주둥이


2.

위고가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얘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위고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 사회는 두 번의 혁명을 치렀다. 그 여파로 그는 20년이란 긴 망명생활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위고는 원래 보수적 왕당파였으나 진보적 공화파로 변신을 해간다.


이와 함께 차츰 민중의 존재도 깨달아나가게 된다. 카지모도는 바로 이러한 민중을 상징한다. 그는 비록 지체도 낮고 외모도 추하고 지능도 낮아 보이지만, 자신과 같이 가장 천대받는 약자였던 집시 여인을 목숨을 걸고 구해낸다.


카지모도의 양부인 신부로 상징되는 성직자나 귀족 계급 등은 겉으론 숭고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위의식과 도덕적 위선 등이 기괴한 모습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신부가 에스메랄다를 혐오하면서도 그녀에게 미칠 듯이 사랑 고백을 하는 모습은 기괴하기조차 하다.


카지모도는 겉으로는 기괴한 외모를 가졌으나 그러한 기괴함이 어떻게 숭고함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카지모도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목전에 둔 에스메랄다를 구출하여 성당으로 도망가는 순간, “자신이 존엄하고 굳세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낀다.


“그토록 추악하고 못 생긴 인간이 가장 불행한 인간을 지켜냈다는 것 …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는 자연과 사회의 두 극단에서 서있는 불행한 존재였다. 그런 두 사람이 몸을 맞대고 서로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트르담 드 파리』를 읽으면, 한국문학에서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1925)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혹시 나도향이 위고의 이 작품을 읽고 이에 아이디어를 얻어 「벙어리 삼룡이」를 창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아주 억측만은 아닌 것 같다.


3.

위고의 대표작 『레미제라블』은 1910년대 국내에서 이미 번역이 돼 신문에 연재된다. 이에 반해 『노트르담 드 파리』는 이로부터 한참 후인 1950년대 들어서야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다. 그러니 나도향이 이를 읽었을 리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벙어리 삼룡이」가 정확히 1925년 7월에 발표되는데, 그 두 달 전인 1925년 5월 22일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외국에서 수입한 영화 『노틀담의 곱사등이』 가 상영된다. 그렇다면 나도향이 이 영화를 봤을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개봉 전 영화를 예고하는 기사도 내보내 나름 이 영화가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듯싶다. 흥미로운 건 「벙어리 삼룡이」 역시 발표된 4년 후인 1929년 『아리랑』 감독 나운규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다는 점이다.


「벙어리 삼룡이」의 삼룡은 하인 신분이며 “땅딸보에 고개가 달라붙어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그래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두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 같이 보이니 이는 카지모도의 모습과 흡사하다.


삼룡은 스물세 살이 되도록 결코 사랑으로서 어떠한 여자를 대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정욕을 가진 사람인 벙어리도 그의 피가 차디찰 리는 없었다. 노예와 같이 굴종의 삶을 살아가던 삼룡이지만, 주인집 도령이 선녀 같

은 주인 색시를 학대하고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의 마음이 뻗쳐올라 미친 사자와 같이 뛰어들어 도령을 내어 던지고 새색시를 둘러메고 나온다.


그 일로 삼룡은 주인집서 쫓겨나나, 그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바, 주인집에 방화를 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주인아씨를 구한다, 삼룡은 그러한 행동 속에서 자기가 여태까지 경험치 못한 즐거운 쾌감과 행복을 느끼며 색시를 구한 후 자신은 색시의 무릎에 누워 숨을 거둔다.


비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게도 뜨거운 욕망은 있는 것이며, 「벙어리 삼룡이」에서 ‘벙어리’는 욕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었던 당대 식민지 현실의 민중의 은유일 수도 있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뉴욕 모마 미술관에서, 「아비뇽의 처녀들」과 「개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