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의 ‘조선문화연구회가’ 주관하는 세미나 참석차 도쿄에 갔다가 이케부쿠로의 동경 예술극장 옆에 있는 릿쿄 대학을 구경하러 갔다. 담쟁이덩굴로 덮인 릿쿄 대학 본관 건물은 튜더 풍의 석조 마감 건물인 연세대학교 본관 건물인 언더우드 관과 아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릿쿄 대학과 연세대학교는 건물 외양만 아니라 캠퍼스 분위기도 비슷하고, 둘 다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듣기론 두 학교가 자매결연 같은 것을 맺고 있어, 교수와 학생들을 정기적으로 교환하는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시인 윤동주는 1942년 이 대학에 한 학기 정도를 다녔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김상용 시인도 이 대학 영문과 출신이다. 윤동주는 이 대학에 잠깐 있은 후 같은 해 자신이 존경한 시인 정지용이 다녔던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을 간다.
윤동주는, 검거되기 1년 전 릿쿄 대학을 머물던 시기, 「쉽게 씌어진 시」(1942.6.3.)를 창작한다. “동경 교외의 어느 조용한 하숙방”(「사랑스러운 추억」)에서 썼을 이 시는 결국 유작시가 되었고, 해방 후인 1947년 정지용에 의해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다.
정지용은,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던 시인을 암살하고 저희(일본)도 망했다. 시인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십여 편은 내게 있다”라고 하며,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한다.
2.
1980년대 후반 연세대학교에서 교양국어 강사를 하던 시절, 『대학국어』 교과서에 「쉽게 씌어진 시」가 수록돼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때 접했던 시일지 모르지만, 나는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이 시를 유독 열심을 갖고 강의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 시는 윤동주의 짧은 생애 중에서도 최후의 작품이 되는지라, 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숙집 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린”다는 표현이 앞뒤로 반복되는데, 멀리 용정을 떠나 서울서 또 도쿄서 타향살이를 했던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읽혀 마음이 짠하다.
고향에서 보내준 학비 봉투를 받아 들고 강의를 들으러 가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구절에선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고, 무력한 자신의 삶의 굴욕을 부끄러워하며 진정으로 괴로워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라는 구절은 이 시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그냥 “내몰고”라고 하지 못하고 “조곰 내몰고”라고 한 데서, 소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겸허하면서도 순결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내내 부끄럽고 괴로워하지만, 시 끝 부분에 가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고 말한다. 소망을 잃지 않고 결단의 순간이 왔을 때 역시 그의 시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벼리고 있는 것이다.
1986년 1학기에는 연세대 경영학과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강의를 했었다. 경영학과는 학생 수가 많아서 여러 반으로 분반이 돼있었다. 그중의 한 반이었을 텐데 학생들 중엔 그로부터 1년 후인 6월 항쟁 때 희생당한 이한열 군이 있었다.
3.
이한열이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당시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동료에 안긴 사진을 봤을 때 나는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수업시간에 나는 농담을 잘하는 편인데 이한열은 그저 마지못해 웃을 뿐 수업에 늘 진지했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수업시간에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들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서 어쩐지 윤동주를 느끼게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년이 지난 1989년 그의 추모문집이 발간됐다.
나는 뜻밖에도 거기서 그가 나에 대해 몇 마디 남긴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짧은 생애 안에 내가 잠깐 그와 함께 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가 살았다면 그 역시 어느덧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을 터인데, 다음은 그가 남긴 글의 일부 내용이다.
“만남에 대해 쓰고자 한다. … 오늘 아침 뜻밖의 국어담당 양 강사와의 만남은 우수의 거리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신촌 거리의 짧음을 새삼 느끼게 했다.
그는 3월 첫 강의시간에 우리와의 우연한 만남을 강조했으며, 며칠 전 종강 시간에는 필연적 만남으로 규정지음으로 해서 마지막 국어시간을 함축성 있게 느끼도록 나를 유도했었다.
그러했던 그와의 뜻밖의 재회가 나에게 만남이란 단어에 집착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첫 기말고사 시험이 국어였으니, 이러한 상황은 나를 어쩔 수 없이 펜을 들게 했다. …" (1986.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