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교수, 구조주의와 007 이야기

by 양문규

1.

지난 2월 이어령 교수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옛날부터 그 양반 명성이 얼마나 자자했던지 난 이미 중학생 때 선생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도 있다. 그 후 대학원 다닐 땐 이화여대와의 교환 학점 제도가 있어 그 대학에 재직하던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선생은 역시 소문대로 강의 첫 시간부터 달변의 솜씨로 기염을 토했다. 고인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강의하는 선생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면 첨단 문명사회의 현대인 같은데, 옆모습을 보면 하악이 발달돼 원시시대의 크로마뇽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그때 선생의 강의주제는 구조주의 문학론이었다. 선생은 프랑스에서 어떤 옷이나 구두가 유행하면 몇 달도 안 돼 한국에 수입되지만, 프랑스서 탄생한 구조주의 문학 이론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수입된다고 우리 학문의 후진성을 개탄했다.


내 생각엔 외국의 이론을 빨리 들여오지 못하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이를 우리의 현실에 맞지 않게 받아들이는 게 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이어령 선생 특유의 기발한 강의는 나름 흥미로웠고 나 역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그때 들은 내용을 자주 써먹기도 했다.


2.

프랑스 구조주의 문학론에 중요한 힌트를 준 선행의 연구가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학』(1958)이다. 그래서 선생은 수업 초반엔 이를 교재로 삼아 강의를 했다. 프로프는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전해지는 수 천 개의 러시아 민담을 수집한 사람이다.


이들 수천 개의 민담은 각각 가지각색의 내용을 가졌지만, 프로프는 이들에게서 공통된 문법 체계(이런 것이 구조다!)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프로프는 그 민담들 안에서 공통된 일곱 행위자들의 모형을 만든다.


민담은, 통상 괴물(⓵악한)이 공주(⓶희생되는 주인공)를 납치해가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면 왕(⓷발송자)이 공주를 구해오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는 포고를 내리고, 이에 공주를 구하겠다고 몇 명의 인물들(⓸가짜 주인공)이 나서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윽고 공주를 구하는 진짜 인물(⓹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는 공주를 구하러 가기 전 공주를 구할 비책을 전해주는 사람(⓺기증자)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공주를 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람(⓻조력자)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미션에 성공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어령 선생은 이러한 민담의 구조가 현대의 대중문학에서도 반복이 된다고 본다. 이를 프랑스 구조주의 문학연구자인 롤랑 바르트가, 이언 플레밍의 스파이 소설 007 이야기를 분석한 데서 예를 들어 설명했다.


007 이야기 역시 악한이 어떤 인물을 납치해가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단 납치되는 이는 ‘공주’가 아니라 ‘과학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 따위를 만들 수 있는 자유진영의 과학자(⓶희생되는 주인공)이다.


과학자를 납치해간 이는 공산진영의 첩보 부원, 가령 소련의 KGB 요원, 혹은 흥미를 배가하기 위해 죽은 줄 알았던 히틀러가 살아남아 남미 아마존 강의 밀림에 건설한 새로운 지하 제국의 요원(⓵악한)이다.


007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영국 비밀정보부의 비밀요원인 제임스 본드가 해변에서 아름다운 여인들과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정보부(⓷발송자)의 호출 명령을 받고서는. 아쉬워하는 여자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떠난다.


정보국에 도착한 본드는 정보국으로부터 자유진영의 과학자가 납치됐다는 브리핑을 받는다. 그 과학자를 구출하기 위해 몇 명의 비밀요원들(⓸가짜 주인공)을 보냈으나 이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점과 함께 그러니 본드(⓹주인공)가 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듣는다.


본드는 미션 수행을 위해 출발 직전 신무기 제조자(⓺기증자)로부터 여러 장비를 전해 받는다. 그중 대표적인 게 첨단무기가 장착된 007 가방이다. 한때 출장 가는 이들은 모두 이 가방을 갖고 다녔다. 비밀번호가 있고 양쪽 버튼을 누르면 용수철 튀듯 열리는 그 가방 말이다.


마지막으로 007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원래 본드를 유혹하기 위해 적국에서 파견된 스파이였으나, 본드와 하룻밤(?)을 즐기고 그의 성적 매력에 푹 빠져 본드를 결정적으로 돕게 되는 섹시 미 넘치는 본드 걸(⓻조력자)의 등장이다.


이어령 선생은 프로프가 수집한 러시아 민담과 007 이야기는 전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야기지만 이들에게는 공통된 인물 행위 기능을 보여주는 구조가 있고, 이 구조의 비교를 통해 007 이야기가 갖는 주제적 의미를 좀 더 확연하게 밝힐 수 있다고 본다.


가령 공산진영의 정보부가 ‘악한’이고 자유진영의 정보부가 ‘발송자’로 설정된다는 점은 007 이야기가 동서 냉전의 산물이라는 것, ‘희생되는 주인공’과 ‘기증자’가 과학자이고 ‘조력자’가 본드 걸이라는 설정은 007 이야기가 과학과 섹스 시대의 산물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

롤랑 바르트가 007 이야기를 분석한 것을 실제 글로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어령 선생이 롤랑 바르트가 이와 비슷이 얘기한 것을 선생이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구조주의 문학론을 강의할 때마다 이어령 선생에게 들은 내용에 양념을 보태 학생들에게 설명해줘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학생들이 구조주의 문학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구조주의 문학론의 요체는 정작 이해하지 못하고 007 이야기만 재미있게 들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유용하면(useful)서도 재미있는(sweet) 강의가 내 강의의 목표였는데 늘 후자가 우세했던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교도소, 쓸쓸했던 인문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