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포르투갈은 비행기로 이동했다. 마침 포르투로 가는 저가 항공의 비행기 편이 있어 일부러 그곳을 둘러 리스본으로 가기로 했다.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로 리스본과 마찬가지로 대서양을 향해 나있는 항구 도시다.
포르투는 아무래도 리스본보다는 볼거리가 적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는 성당을 방문해 그곳을 비교적 자세히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카르무 성당은, 그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아줄레주 양식의 푸른색 타일이 인상적이다.
과거 이슬람 세력이 지배한 스페인 남부서도 이런 타일을 봤는데, 카르무 성당 벽은 단순한 벽이 아닌 성경 이야기를 모자이크 타일로 꾸민 하나의 대형 작품이다. 타일 기법은 이슬람 사람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를 기독교 성화로 창조해냈다.
클레리구스 성당은 포르투갈 성당의 진수를 느끼게 했다. 이 성당은 포르투 시내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어디서나 눈에 띄는데, 그곳을 오르는 구불구불하고 어수선한 언덕길은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의 바오로 성당을 올라가는 길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클레리구스 성당 내부 장식의 형태와 색채는 유럽 여느 성당들과는 달리 아주 호화롭고 이채롭다. 파이프 오르간을 장식하는 틀은 구불구불 대단히 화려했는데, 그 장식은 마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인도나 브라질 열대림의 분위기를 연상시켜 정열적인 느낌마저 들게 했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최초로 인도로 가는 직항로를 발견하면서 서양인에 의한 500년간의 동양 지배 시대를 개시한다. 그들이 인도 항로를 찾고자 한 목표는 후추, 계피 등의 향신료를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그곳서 먹은 추로스에는 유난히 계피가 많이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를 발견하고자 한 또 다른 목표가 있었는데, 그건 미신과도 같은 집요한 종교적 목표였다. 허황된 얘기이기는 하나 인도에 있다는 기독교 군주를 찾아서 이와 협력해 이슬람 세력을 박멸코자 하는 십자군적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인도 원정에 나선 선단들은 리스본 항을 출발할 때마다 미사 등 성대한 종교적 의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항해를 통해 얻은 부는 다시 성당을 건축하고 장식하는데 쏟아부었다. 클레리구스 성당의 장식은 알게 모르게 화려한 인도 힌두교 사원을 흉내 낸 듯도 싶다.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시작해, 인도 서해안의 고야를 정점으로 말레이 해협의 말라카를 거쳐 좀 더 먼 끄트머리인 마카오에까지 식민지 상관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포르투를 걸으면서 그 이전에 관광했던 마카오라는 도시를 다시 걷는 데자뷔를 느꼈다.
구릉이나 언덕을 깎지 않고 이를 살려 만든 구불구불한 길과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좁은 골목과 계단들, 그곳에 닥지닥지 붙은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에 형형색색으로 나부끼는 빨래들, 또 광장이나 도로에 색깔과 무늬들이 들어간 모자이크 식 돌길들이 그랬다.
포르투 부두가 보이는 언덕길을 내려가다 계단 가장자리 집에 사는 황갈색 피부의 할머니가 들어오라 해 둘렀다 나왔다. 그곳의 인정, 풍광이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달랐던 건, 포르투갈이 자신의 곳곳의 식민지들과 인종적, 문화적으로 뒤섞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마카오는 포르투갈 함정이 먼저 갔으나, 당시 중국 영토에 들어가지 못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처음엔 포르투갈 식민지인 고야에 도착, 이곳서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낸 후 마카오 선교회로 간다.
마카오는 중국 전도사업의 도약대였다. 상인들과 달리 소위 문화를 들고 간 선교사들은 중국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의 북학파들은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학 서적을 맹렬하게 수집하고 학습한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보고 서학으로 넘어간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마카오까지 간 것은 그들의 물질적 욕망에서 비롯됐지만, 마카오를 무대로 시작된 예수회의 활동은 중국이 서구의 지식과 문화와 상호 교류를 하는 계기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