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남쪽 끝의 뮌헨을 여행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를 탔다. 거리상으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기차로 시간 반이 채 안 걸렸던 것 같다. 뮌헨이 수도로 돼있는 바이에른 주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로 오스트리아와 붙어 있다.
바이에른 지역이 오스트리아와 이웃이다 보니 양쪽 지역의 정서가 비슷한가 보다. 오스트리아 출생인 히틀러가 비엔나의 미술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한 후, ‘루저’ 생활을 하던 중 독일로 이주하면서 뮌헨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뮌헨은 히틀러 생애의 전환점을 만든다. 히틀러는 그곳에서 장차 나치스가 될 독일노동자당에 입당을 하고 당원 활동을 하면서 민중선동 기술을 연마한다. 구시청사와 시계탑이 있는 마리엔 광장 인근 비어홀들은 히틀러가 정치적 연설을 하던 곳들이다.
예전 우리 동네에 ‘뮌헨 호프’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농담이지만 히틀러를 생각하며 붙인 이름은 아니리라. 히틀러는 호프집에서 연설뿐 아니라 쿠데타 음모까지 꾸미는 대중 집회를 열어 감옥소까지 가게 되는데 오히려 이 사건이 그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다.
당시 뮌헨 비어홀에서 히틀러의 연설을 지켜본 기자의 말에 의하면, 그는 연설이 절정에 이르면 자기에게 매혹돼, 거짓말조차도 진정성이 흘러넘치게 했다고 한다. 희대의 사기꾼은 사기행각을 벌일 때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로 착각한다는데 히틀러가 바로 그런 경지였나 보다.
히틀러 연설의 단골 메뉴 중 하나는 1차 대전 후 독일인들 실업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쟁 여파로 모든 행복과 권력을 부인당한 독일 대중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갔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그들에게 분노를 돌린다.
히틀러가 이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할 때마다,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때려잡자! 목매달자!” 하면서 열광했다고 한다. 반유대주의는 유럽의 우파민족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맞수인 진보나 좌파를 공격할 때 쓰던 일종의 ‘문화코드’로, 히틀러는 이를 권력 장악에 십분 활용한다.
2.
뮌헨에 도착해 묵게 된 숙소는 중앙역 앞 ‘괴테’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다. 대문호의 이름을 딴 게 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호텔 로비에는 독일 국기와 터키 국기를 걸어놓고, 터키 관광객들도 많으며 프런트에는 터키 사람인 듯싶은 사람이 손님을 맞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 뮌헨 역전은, 히잡 쓴 여인, 케말 파샤가 썼던 페즈 모자의 남자들이 북적거려, 마치 이스탄불의 어느 거리를 걷는 듯싶었다. 우리나라도 어느 지역에 가보면 특정 외국인이 사는 동네가 있는데, 이곳은 터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독일에는 터키 출신 이주민들이 한 약 300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대도시의 허름한 구시가나, 재건축 요망 지구에 밀집해서 사는데 뮌헨 역전도 바로 그러한 곳들 중의 하나인가 보다.
덕분에 저녁은 터키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식당서 했다. 유럽 어느 식당을 가도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이들이 없는데, 터키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 일거일동을 지켜봤다. 그 식당은 터키 이주민들의 ‘맛집’이었던가 본데, 그들이 쳐다봐 더 맛있게 먹었다.
이차대전 후 고도성장기 베를린 장벽이 놓이고 동독 노동자 유입이 차단되며 인력대란을 겪던 독일은 터키 노동자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인다. 지금은 터키인들이 독일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한 구성원이 됐지만, 인종주의가 판치던 히틀러 시대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든다.
물론 독일은 통일 뒤 실업자가 늘면서 다시 네오나치 세력의 외국인 배척운동이 나타나고 터키인들이 방화로 불타 죽기도 했다. 낯선 사람이나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파민족주의자들은 이런 경계심을 이용, 사회적 불만을 외국인들에게로 돌린다.
나치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유대인들 말고도, 더 나아가 반체제 인물, 공산주의자들, 신체적‧정신적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 집시,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집단들을 추가하여 이들을 박멸코자 하면서 이를 통해 사회정치적 또는 경제적 불안과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다.
현재 뮌헨은 자동차, 축구, 맥주 축제 등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히틀러 시대에도 표현주의 미술의 온상으로 피카소조차 선망한 예술도시였지만, 아스팔트 우파서 시작한 히틀러 따위가 사회‧경제적 불안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세계를 황폐화시킨 나치의 발원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