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시내 훔볼트대학 근처엔 훔볼트 자연사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박물관들이 모인 이른바 ‘박물관 섬’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이 모인 페르가몬 박물관 등의 유명 박물관들도 있지만 베를린을 잠깐 둘렀다 가는 여행객이 이를 모두 구경하고 다니기는 어렵다.
나는 그중 베를린 국립미술관 정확히는 Alte(구) 국립미술관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가봤다. 이름 하여 프랑스 인상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그림 전시회다.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에 강력하게 반발해 발생한 유파임에도, 양자를 함께 전시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 두 파는 스타일에서도 강렬히 대조를 이룬다. 가령 전시된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그림이 프랑스 특유의 삶의 기쁨을 보여주는 데 반해, 독일 표현주의 회화는 불안과 긴장 속에 놓인 우울한 인생을 보여준다.
인상주의가 성행하던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유럽의 자본주의는 절정을 이루고 낙관적인 미래가 보장된 듯싶었다. 그러나 세기말에 이르고 특히 20세기 들어 1차 대전을 치르면서 유럽의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로 바뀌고 표현주의 미술은 이러한 어두운 배경서 성장한다.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이야 파리 오르세에서, 또는 미국 유명 미술관 어디서든 실컷 볼 수 있었지만, 이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는 20세기 초반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표현주의 미술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자극을 준 이는 노르웨이 화가 뭉크다. 이 전시에도 뭉크의 그림들이 선두에 놓여 있다. 그의 그림은 주지하다시피 얼굴이나 자세의 왜곡을 통해, 인간의 불안, 고독, 조바심의 내적 심리를 표현하는데, 독일 표현주의 미술은 이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표현주의화가 중엔 키르히너라는 이가 있다. 이 전시회에도 음산한 베를린 거리를 배경으로 한 그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가 한국문학 연구자에게 관심을 끄는 건, 그의 「군복을 입은 자화상」(1915년) 그림이 「날개」의 작가 이상의 「1928년 자화상」 그림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키르히너의 이 자화상 그림은 1차 대전에 자원입대했다가 신경쇠약에 걸린 키르히너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 문학의 특징 역시 불안과 공포인데 이상의 자화상 그림에서 뭉크, 키르히너 등의 영향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뭉크는 불행했던 개인사로 인해 평생을 불안, 공포, 절규의 그림을 그렸어도 80살이 넘도록 살았다. 이에 비해, 키르히너는 처음엔 히틀러에 충성했음에도 1937년 나치정부가 기획 개최한 ‘퇴폐미술전’을 통해 모욕, 조롱당하고, 이듬해 1938년 58살의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다.
나치는, 키르히너 등의 표현주의 미술을 사회적으로 타락을 부추기는 부도덕한 미술품이라고 간주, 이에 대한 경종을 울려 독일국민에게 올바른 예술관을 심어준다는 취지로 퇴폐미술전을 연 것인데 이것이 오히려 대중들로부터도 많은 호응을 얻는다.
퇴폐미술전에 전시된 작품에는 작가가 스스로를 조롱하는 듯한 문구가 달렸다. “우리는 마치 화가나 시인이나 뭐나 된 듯이 행동하나, 실상 우리가 하는 짓은 그저 무아지경에 빠져 건방을 떠는 거다. 우리는 세상을 속여먹고 속물들을 구슬려 우리에게 아양을 떨게 한다.”
이상의 문학 역시 일제 파시즘 체제 아래서 그런 공격을 받을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 초기에 이상은 그의 선배나 동료시인들이 사용해 온 언어로는 그가 겪는 불안한 삶을 기술할 수 없기 때문에 숫자 등으로 알 수 없는 장난과도 같은 시를 쓴다.
1부터 13인의 아이까지가 반복되는 ․「오감도」가 뭣을 의미하느냐로 많은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그냥 그것은 불안한 분위기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불안이란? 인간경험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을 확실히 따라다니는 동반자다.
「오감도」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불안의 방어기제로 무의미한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독일 표현주의나 이상 문학에 나타난 극도의 불안의식은 20세기 양차 대전 사이 현대인의 불안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함으로써 이를 치유해 주는 기능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