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함께 분단이 시작되면서 강원도 땅도 예외 없이 분단을 겪는다. 아니 오히려 태백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강원도는 땅이 두 동강이 나면서 분단을 더 극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조국」(1990년)이라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이 있다. 소위 북한공작원 출신 김진계(1918~1992)라는 이가 구술한 자신의 일생을 전문작가가 기록했다. 김진계는 강릉시 사천면 출신이다. 일제 때 징용을 살고 돌아온 그는 해방 후 이 지역서 남로당원으로 활동을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됐고 제대 후 북에 남아 살던 중 공작원(최후의 남파공작으로 추정된다.)이 돼 남파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된다. 그 후 무기징역이 확정돼 18년간을 복역하다가 고령자로 석방, 고향 사천으로 돌아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다.
김진계가 분단과 관련돼 남다른 체험을 하게 된 데에는 강원도 지역의 특수성과 관련된다. 그가 태어난 강원 영동지방의 사천 지역은, 허리가 동강 난 분단의 상징인 태백산맥과 동해 바다가 만나는 지역이다.
김진계가 한국전쟁 당시 결혼한 가족과 헤어져, 퇴각하는 인민군과 합류해 쉽게 북쪽으로 올라갔던 것도, 강릉에서 동해안 길을 따라 당시 강원도 도당이 있던 원산을 찾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만 해도 원산과 강릉은 하나로 된 익숙한 교통권이었다. 강릉서 당시 서울을 가자면 양양까지 버스로 가 그곳에서 다시 열차를 이용, 원산으로 간 후 경원선을 타고 서울로 갔다. 그것이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유일한 대중 교통망이었다.
김진계는 인민군에서 제대한 이후 재혼을 하여 북한서 살게 된다. 이것으로 그의 불행한 삶이 종지부를 찍나 싶었지만 그는 40세 되던 해인 1958년 남파 공작원으로 결정된다. 김진계의 고향이 남파하기에 좋은 경로인 동해 바다에 연해있는 강릉 사천면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고성으로 가서(고성군은 동해안의 ‘칠레’라는 별명도 있듯이 구역이 넓고 길어 가운데 토막이 잘리고도 남한, 북한에 따로 다 있다.) 초대소에 머물다가 음력 그믐을 이용해 공작선을 타고 멀리 공해를 돌아,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다가 날이 저물면 목적지에 상륙한다.
그가 침투했던 대표적인 지역이 동해안의 속초 대포, 사천, 옥계 금진, 묵호 등이다. 1996년 강릉 정동진 잠수함 사건이 난 그쪽이다. 해안으로 침투해서는 사천 바닷가에 널린 무덤을 접선 장소나 ‘비트(비밀 아지트)’로 활용하곤 한다.
김진계는 남파하여 사천 고향에 두고 온 남쪽의 아내를 비밀리에 만나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때 만난 아내는, 함께 남파된 남편의 동료에게 안타깝고도 슬픈 질문을 던진다. “저, 꼬옥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우리 주인 북에서 색시를 얻어 살림하고 있죠?”
김진계는 북쪽에 살면서는 남쪽에 두고 온 아내와 외아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남파하면서는 생이별을 하고 온 북쪽의 아내와 자식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는 작품 후기에서 북쪽에 사는 막내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글을 띄운다.
“남북한 법이 허용한다면 아빠 마음 같아서는 이 시각이라도 뛰쳐나가서 너를 만나보고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의 사적지, 이율곡의 사적, 강릉경포대를 구경시켜주고 싶구나. 아빠는 몹시 늙었지만 너희는 통일의 날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는 계속해서 “아빠와 생이별하고 일평생 외롭게 지낸 너의 엄마에게 항상 효도하는 마음을 잃지 말기를” 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가 없어 노인네가 어느 때는 강릉 시내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마음을 진정코자 한다.
분단의 현실,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들이 많지만 남파간첩으로서의 김진계와 같은 흔치 않은 경험을 그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산맥과 바다가 북쪽으로 직접 이어지는 강릉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