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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이라는 곳

by 양문규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영동지방의 양양은 강릉만큼 큰 대처였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때 풍비박산이 난다. 강릉서 동해바다를 끼고 북상을 하다 보면 유독 넓고 푸르른 바다를 안은 양양의 삼팔 휴게소를 만나게 된다.

해방 직후 이 삼팔 휴게소 이북으로 소련군이 진주한다. 당시 소련군은 그 위치를 착각해 강릉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양양으로 올라갔다는 얘기도 있다. 이 삼팔선은, 첨에는 단순한 지리적 분계선이었지만 종국엔 동족상잔까지 벌이며 민족적 분단으로 나가는 시발점이 된다.


방금 말한 대로 양양은 해방 직후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이북 땅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분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이 없어지고 대신 훨씬 그 위로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이른바 수복 지역이 된다. 그 와중에 양양의 인구는 반으로 줄어드는 참화를 겪는다.


양양 출신 소설가 이경자의 <사랑과 상처>(1996년)는 무대가 양양인데, 바로 이 시기 양양 사람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해방이 되기 전, 설악산 입구인 물치 바닷가 가까운 버덩(평야)에 살던 여주인공은, 산골인 오색 쪽 화전 마을의 남자에게로 시집을 가게 된다.


남편은 화전 마을 출신이기는 하지만, 시댁 식구들의 응석받이로 자라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세상 어려움 모르고 산 이다. 일제 시기 학교에서 배운 기술로 인근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광에서 비교적 편안한 전기기사 일을 했다.


해방 후 양양이 ‘인공(인민공화국)’ 치하의 땅이 되자, 이때부터 남편은 시류를 타면서 일종의 멋으로 좌익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래저래 세상은 잘 뒤집어졌다.”면서, “나 같은 화전민 출신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이 왔다”라고 들떠한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이 좌익 사상을 가졌고 노동자라고 떠들기는 해도, 얼뜨기 좌익인 데다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 못하는 천성이라, 광산서 일했던 일본인 상관들을, 몰래 삼팔선까지 안내하고 남쪽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시기 이미 소련의 군대와 부락자치대와 민청대원들이 양양 쪽 삼팔선을 지키기 시작했고 남편 역시 ‘삼팔선 경비대’ 부소대장이었음에도, 남쪽으로 간다는 사람들의 탈출을 돕곤 한다. 당시 남북을 왕래하는 이들 중엔 몰래 남쪽 물건을 들여다 파는 소위 밀수꾼들도 있었다.


남편 스스로도 자신의 고향 화전골이 지겹기도 하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 월남을 단행한다. 당시 주인공 식구들이 살던 한계령 남쪽 지역은 삼팔선을 넘기가 쉬운 곳으로 산길을 사십 리쯤 걸어가면 미군이 관할하는 인제 땅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인공 가족은 1946년 서울로 왔지만, 도시 생활에 적응을 못한 남편은 이번에는 “이남은 개판”이라며 남한사회에 실망한다. 결국 우익인 대한청년단에게 붙들려가 고초를 치른 후, 다시 북쪽의 양양으로 돌아간다.


다시 북으로 돌아온 남편은, 자아비판을 피하기 위해 부락회의에 불려 가 남한 사회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6‧25가 터졌을 때는 인민군을 도와 부역을 하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자 국민방위군에 뽑혀 입대한다.


양양은 분계선의 넘나듦이 심했고, 삼팔선과 휴전선이 왔다 갔다 그어지며 어떤 때는 이북 땅으로 어떤 때는 이남 땅이 되어 세상이 몇 차례나 뒤집어지는 경우를 겪는다. 그럴 때마다 이곳 사람들은 두 상전, 즉 두 ‘국가’를 모시면서 눈치껏 목숨 보전을 위해 살아가야 했다.


주인공 가족은 삼팔선 근처 살아서 남과 북을 별생각 없이 드나들었다. 예컨대 강원도 산골이 싫어 대처로 가서 살고 싶은 단순한 욕구에서 이북과 이남을 왔다 갔다 했지만, 이남 가서는 이남 사람으로 이북에서는 이북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아야 하는 고초를 겪는다.


가령 남편은 삼팔선을 넘어 월남하던 당시, 이북에서 사용했던 좌익 문건 등의 용지를 잎담배로 말아 피우려고 갖고 월남하다 남한 당국의 방위대에게 적발돼 호되게 문초를 당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겪는다.


이에 반해 여주인공의 친정 쪽 오빠들은 일제시기 농민조합 운동을 했고 해방 후 공산치하 양양에서 높은 자리들을 차지한다. 이들은 모두들 빨갱이 사상과 정치의 물을 먹은 셈이고, 결국 휴전이 되기 전 죽거나 휴전선 이북으로 가면서 양양의 친정 마을은 풍비박산이 된다.


해방 전 양양은 속초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곳이었다. 그러나 속초는 전쟁 후 함경도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머물면서 커졌지만, 양양은 거꾸로 전쟁 통에 인공치하 사람들이 죽거나 북쪽으로 가면서 쭉정이 같이 쭈그러든다.


우리 땅 어느 곳도 분단의 상처가 없는 곳이 없지만 양양은 그 상처와 고통을 유독 심히 앓은 곳이다.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리영희, <반세기의 신화>)라고 했지만, 아직도 그 고통과 상처를 자꾸 환기시키는 이 땅의 분단의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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