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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 이육사 문학관에서

by 양문규

요즘 전국 어느 곳을 가도 지방자치단체는 지역 홍보와 관광을 위해 다양한 문화관광 시설을 마련해 놓거나 후원을 한다. 그중 하나가 그곳 출신 작가의 문학관이다. 지역끼리 경쟁도 있고 보니까 어느 곳을 가 봐도 세워놓은 건축물은 훌륭하고 볼거리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살아생전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렇게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들의 기념관은 멋들어지고 화려하며 때로는 과장되게 조성돼 있어 작가의 개성이나 그들이 남긴 작품의 분위기와 사뭇 어울리지 않아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문학관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난 게, 막상 책에서 봤던 자료들도 문학관에 가서 직접 보면 나름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 일부러 문학관을 찾기도 하지만 학생들과 답사 여행을 갔다가 두르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육사 문학관도 학생들과 같이 했는데, 그 문학관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있다. 육사의 고향인 도산면엔 퇴계학의 요람 도산서원도 있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하여 그의 문학관을 답사할 때는 인근의 도산서원, 또는 유교문화박물관도 둘렀다 가게 마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육사 시는 지조 높은 유학자 내지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민중 위에서 상전 노릇을 하려 했던 권력 화한 양반이 아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을 했던’ 올곧은 선비의 그 모습 말이다.


육사 시에 가끔은 어려운 한자어가 등장하고, 대표 시 「절정」이 기승전결의 한시 풍을 드러낸다든지, 「절정」이나 「교목」 같은 시에서 자신의 삶으로부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결단을 보여주는 모습은, 현세적 권력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반발하는 선비를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절정」의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시구에선 어딘지 모르게 모더니즘의 취향이 느껴지기도 하고, 「청포도」의 ‘흰 돛단배’나 ‘은 쟁반’이 놓인 ‘식탁’은 서양적 풍경에 더 어울려 그의 시의 서구 지향도 느끼게 한다.


딴 얘기를 좀 하자면 이육사 유고 시집을 낸 이는 그의 아우 이원조다. 이원조는 당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였고 불문학을 전공한 자였음에도, 그의 비평에는 서양문학 지식과 함께 유교적 교양이 흠뻑 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었나 보다.


이원조는 형의 시집에 쓴 발문에서, “그가 이 세상을 왔다 간 자취라도 남겨 보려 하니 실로 그 발자취는 자욱 자욱이 피가 고일만큼 신산하고 불행한 것이었다.”라고 말해, 그의 시가 삶의 비장함, 단호함과 결연함만을 보여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육사의 소품 시 「춘수삼제(春愁三題)」를 보면, 이른 아침 봄날 골목길에 미나리 장수가 길게 외고 가는 소리를 듣고, 감옥살이를 하는 맏아들의 입맛을 그리워하는 노파의 흐려진 눈동자를 그리고 있어, 시인의 정겹고 따듯한 마음을 만나게 된다.


문학관 얘기를 하다가 육사 시에 대한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날 학생들과의 답사 일정이 빡빡해, 아침에 문도 열리기 전에 도착해 기다리다 개관을 하자마자 우리 일행만이 오롯이 문학관에 입장을 했다.


입장을 하자마자 이육사 관련 영상을 관람하게 됐다. 현재 문학관의 영상 자료가 그때 것과 동일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영상, 음악과 함께 성우가 연기하는 이육사의 생애는 책에서 이미 확인한 내용들이지만 그곳에서 들으니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하늘에서 은하수별이 쏟아지는 장면과 함께 육사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계절의 오행」(1938년)이라는 수필의 마지막 부분을 성우가 낭독한다. 성우의 목소리가 좋았는지 아니면 이 좋은 내용을 나 혼자가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들어서 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유언이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팔십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육사는 유언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의 삶엔 오직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4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17회나 투옥하다 옥사를 했으니 그의 삶은 다름 아닌 행동의 연속이었다. 물론 행동은 말이 아닌데, 육사는 시를 쓴다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라고 했다.


육사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행동에 버금가는, 아니 최고의 행동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 인생을 걸고 자신의 삶 모두를 던지는 것이다. 육사가 독립운동이라는 형극의 길을 버티며 갈 수 있었던 것은 시라는 보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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