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그림들로 유명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모네의 그림들도 상당수 걸려 있었다. 모네는 일생을 통해 이것저것 다른 장르의 그림은 시도해 보지 않고 오로지 풍경화가의 외길을 걸어갔던 이로 유명하다.
모네의 풍경화 화폭에는 색채와 빛이 넘실거려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특유의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보여준다. 오르세에서 본 「양산을 쓴 여인」(1866년), 「개양귀비」(1874년)가 그렇고, 유복한 부르주아적 삶 속에서 수없이 그려낸 그의 정원 연못의 수련 그림들이 그렇다.
그런데 오르세에는 그런 풍경화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모네의 다른 풍경화가 하나 있다. 「에트르타의 거친 바다」(1868년)가 그것이다. 노르망디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코끼리 바위 관광지로 알려진 바로 그 바다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곳을 가보지는 못했다.
이 그림이 모네의 일반 풍경화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건, 어두운 색감이 사용됐기 때문인 것 같다. 흐린 날씨에 거친 파도가 이는 광대한 바다 해변에 사람들 몇몇이 웅기중기 모여 위축된 듯이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멀리 한쪽으론 코끼리바위가 바다로 코를 처박고 있다.
모네의 그림답지 않게 스산하고 으스스한 느낌마저 든다. 소설가 모파상은 이 에트르타의 바다를 자신의 대표작 「여자의 일생」(1883년)에서 중요한 무대로 삼아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네의 이 바다 그림과 모파상 작품의 관계를 얘기하기도 한다.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잔느는 노르망디 지방 귀족의 딸로 12살 때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18살에 그곳을 나오면서 새로운 이성을 만날 기대 등, 다가올 장밋빛 인생을 기대하면서 꿈에 부푼다. 그런 그녀 앞에 비록 부유한 귀족은 아니지만 미남 자작 청년 쥘리앙이 등장한다.
잔느는 쥘리앙,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별장 가까이에 있는 바로 그 에트르타 바다로 선상 유람을 나선다. 배는 코끼리 바위가 만들어낸 거대한 아케이드 관문을 향해 나가는데, 이때 묘사되는 에트르타 바다는 모네의 그림과는 다르게 황홀하며 아름다운 곳으로 그려진다.
광활한 바다 위로 태양이 높이 솟아오르자, 바다는 교태를 부리듯 가벼운 안개로 몸을 감싸 태양 빛에 베일을 친다. 그러나 곧 태양의 힘이 절정에 이르자 안개는 증발하여 사라지고 거울처럼 반들반들한 바다가 빛을 반사해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잔느는 감동에 속삭인다. 잔느와 쥘리앙은 둘 다 좀 들뜬상태로 선상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의 눈을 마주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가까이에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잔느는 뭔지 모를 두려움도 있었지만, 쥘리앙과 결혼 후 지중해 코르시카 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코르시카 야생의 향기, 오렌지와 시트론을 익게 하는 태양, 장밋빛 봉우리의 산들, 쪽빛 만과 함께 빛나는 섬이 그녀의 앞날의 행복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잔느의 결혼은 행복의 마침표이자, 불행한 일생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다. 신혼여행서 돌아온 잔느는 별장 앞의 에트르트 바다를 바라보는데 이 바다는 모네가 그린 바다의 어두운 분위기와 사뭇 비슷하다.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파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두터운 먹구름이 미친 듯한 속도로 다가와서 지나가고 또 다른 구름이 뒤쫓아 오곤 했다. … 소금기 머금은 대기와 성난 파도와 일렁이는 소리와 세찬 바람을 가진 바다 …”
잔느는 첫날밤 남편의 거친 행동에도 실망하지만, 남편은 신혼여행을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잔느의 하녀를 건드려 사생아를 낳는다. 잔느의 친정에서는 하녀에게 돈을 주고 사생아와 함께 집에서 쫓아내 사건이 일단락 되는듯하나, 잔느의 불행은 그걸로 끝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이번엔 잔느가 사귀며 의지했던 백작부인과 간통행각을 벌이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살해된다. 남편을 잃은 잔느는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거나, 아들은 학업 도중 매춘부와 눈이 맞아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사업을 한답시고 가산을 탕진하여 잔느를 배신한다.
요컨대 잔느는 처녀 시절 아름다운 인생을 기대했지만 평생을 속고 산, 슬픔과 배신의 일생을 산 주인공이었다. 잔느의 하녀는 처녀의 몸으로 귀족 남자에게 능욕당해 사생아를 낳고 주인집에서 쫓겨나 살아가야 했다.
모파상의 유명한 단편 ‘목걸이’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감지되는데, 모파상은 계속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삶에서 기대할 거란 아무것도 없어! 삶의 의미란 삶에 배신당하는 것밖에 없어! 기대가 없어야 그나마 실망하지 않아! 삶이란 결국 환멸일 뿐이야!
다시 모네의 ‘에트르트의 거친 바다’ 그림으로 돌아오면, 모네의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노래한다. 그러나 바다 그림엔 사람들이 광활한 바다에서 미지의 인생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심란하고 비극적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19세기 중반 인상주의 화가들은 삶의 열락을 그린다. 그러나 일면 다가올 세기말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가 모파상이나 그의 스승인 「보바리 부인」의 플로베르는 삶의 환멸과 어두움을 20세기 소설들에 앞서서 미리미리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