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가 있었던 2001년 나는 미국 유타에서 안식년 중이었다. 당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던 장인이 돌아가셨는데, 국제공항이 일시적으로 폐쇄되어 나는 고사하고 아내조차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생생하다.
당시 유타 지역에는 별 동요는 없었지만, 미국의 새로운 일면을 아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집집마다 성조기가 걸린 건 그렇다 치더라도, 초등학생이던 우리 집 애들은 성조기 색깔인 흰색, 또는 빨간색, 파란색 등의 티셔츠를 일제히 착용하고 등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그때서야 애들 학교서 평상시에도 국가 제창은 물론,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의식을 치른다는 걸 알게 됐다. 캘리포니아서 안식년을 보낸 선생은, 자기애 초등학교에선 수업 시작 전 운동장서 조회를 치르고 성조기를 앞장 세워 단체 입실한다는 얘기까지 해줬다.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인 줄만 알았는데, 국기조차 게양하지 않는 유럽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테러 이후 미국 정부의 무슬림들에 대한 고조된 적개심은 미국의 국가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가늠케 했다.
당시 몇 달 후 추수감사절 때 뉴욕을 여행하려고 했던 계획은 흉흉한 분위기로 취소되고,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흘러 2016년 돼서야 테러 현장인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뉴욕을 찾았다. 사라진 쌍둥이 건물이 있던 곳은 그대로 비워두고 그곳에 호수를 만들어 과거를 반추케 했다.
물론 이 호수 공원 뒤로는 예전의 아픔과는 무관하게, 아니 그 아픔을 씻고 이를 극복했다는 듯이 예전의 것보다 더 높은 새로운 무역센터가 한참 올라가고 있었다. 원래의 무역센터가 무너진 곳과 그 주변은 추모 지역으로 조성해 놓았는데 이름 하여 그라운드 제로다.
그라운드 제로는 원래 좁은 의미로는 핵폭탄이 폭발한 중심 위치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따지자면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이 그라운드 제로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나는 이미 그전에 나가사키의 평화공원을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엔 원폭 투하 당시 성당의 멈춘 시곗바늘 등 폭격의 잔해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들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에 모든 관심을 집약시키며 ‘인류의 평화에 대한 바람’을 말하고 있지만, 일본 군부와 그들이 일으킨 전쟁, 그리고 전시 권력에 대한 고발과 추궁을 보기는 어려웠다.
태평양 전쟁 당시 나가사키와 함께 또 다른 그라운드 제로였던 히로시마에는 미쓰비시 등의 군수공장이 있어 유독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이 많았다. 조선인 피폭자 규모는 약 7만 명, 이 중 4만 명이 숨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자기들만의 피해와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역시, 그동안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벌인 적극적인 군사정책으로 테러를 부추긴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단지 미국이 역사상 가장 엄청난 테러의 피해자임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에 활력을 불어넣고 군사주의의 좀 더 비옥한 토양을 마련한다. 이를테면 그 비극적 테러가 일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겠다며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나선다.
탈레반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그 이전 적극적으로 지원한 정권이다. 미국은 전쟁 초기 탈레반을 손쉽게 격파해 미국인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이후 전쟁은 장기화되고 이라크전과 마찬가지로 아프간전은 예측,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방위산업체들의 전쟁’이 된다.
미국의 방산업체, 대표적으로 록히드마틴, 노스롭그루먼 등은 9‧11 이후 막대한 이윤이 발생하는데 이는 방산업체들의 주가 폭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세계와 중동을 바꿔놓긴 했다.
그러나 변화된 세계는 더욱 불안하고 위험하며 빈곤해졌다. 이 전쟁의 유일한 승자는 막대한 이익을 거둔 미국의 방산업체와 그와 관련된 군산정복합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로 연결되는 그라운드 제로 역사로 들어섰다.
올림픽 주 경기장의 두 배나 된다는 이 역사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40억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지하로 연결되는 로비에는 수천 개의 하얀 기둥이 흰 대리석 바닥 위에 솟았는데, 마치 그라운드 제로의 슬픔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희망찬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라운드 제로 역사에 있는, 신들의 전당 같은 휘황찬란하고 장엄한 조형물들은, 테러의 트라우마를 말끔히 지우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모습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