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네의 그림과 소설 <보바리 부인> 속의 ‘루앙 성당’

by 양문규

모네가 1892년부터 그린 <루앙 성당> 연작 그림은 당연히 성당이 소재지만, 막상 성당의 실체는 어른거리듯 흔들리고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다. 모네의 진정한 소재는 성당이 아니라 빛인 셈인데, 성당 풍경은 오전이냐 오후냐, 아니면 계절의 빛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모네는 빛에 따라 성당 그림을 수도 없이 그릴 수 있었는데 실제 30점 정도 그렸나 보다. 파리 오르세에서는 너무나 많은 모네의 그림에 치어 정작 이 그림을 놓쳤고,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러 미술관서 <아침빛의 루앙 대성당 정문>(1894년)을 오롯이 볼 수 있었다.


루앙성당.png 아침빛의 루앙 대성당 정문


얘기가 좀 딴 데로 흐르지만, 스위스의 바이엘러 미술관은 그 건물 자체가 모네를 오마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 앞의 연못물은 전시실 안으로 흘러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데 그 전시실에는 모네의 <수련>이 전시돼 있다.


또 미술관 창문 밖 들판으로 진홍색 개양귀비가 만개해 흩어져 있다. 모네는 작약과 양귀비를 특별히 좋아했다는데 커다랗게 피는 꽃보다는 한해살이 개양귀비의 소박한 꽃을 즐겼다고 한다. 스위스에 가면 알프스 관광뿐 아니라 이 미술관 구경을 강력 추천해 본다.


KakaoTalk_20190702_201006132_14.jpg 모네를 오마주 한 듯한 바이엘러 미술관


내가 그림 공부를 한 자는 아니니 <루앙 성당> 그림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할 거리는 없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건, 19세기 회화에서 이 유서 깊은 아름다운 성당은 영원한 절대의 대상이 아니라, 빛 또는 인간의 시각적 인상에 따라 변화하는 찰나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점이다.


이 루앙 성당은, 모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1857년)에도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루앙 성당은 고귀하고 존엄스러운 성소이기는커녕 한갓 스캔들의 장소로 추락한다.


<보바리 부인>의 여주인공 엠마 보바리는 루앙 근처의 시골마을 의사인 샤를 보바리에게 시집을 가나, 시골 부르주아지의 세계에 답답해하고 싫증과 권태에 빠진다. 그녀는 지루하고 우울한 현실서 벗어나고픈 욕망으로 법률사무소 서기 일을 하는 젊은 레옹과 바람을 피운다.


이들은 시골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근의 대처인 루앙에서 사랑의 행각을 벌인다. 레옹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엠마는 유혹의 매력을 느끼면서도 유부녀로서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한 가닥 양심의 끈을 부여잡고 루앙 성당서 연인과 만날 것을 약속한다.


레옹은 성당 앞 광장에서 제비꽃을 사서 성당으로 들어간다. 레옹이 보기에 성당의 둥근 돔은 엠마의 사랑의 고백을 엿들으려 허리를 굽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려고 빛나고, 제단의 향로는 향기 속에서 그녀를 천사처럼 나타나기 위해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엠마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성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레옹은 이런 엠마의 신심을 가장한 행동에 화가 치밀면서도 기도에 열중하는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플로베르의 문학적 제자였던 모파상은 성당 스캔들 이야기서 한 술 더 뜬다. 모파상의 장편 <벨아미>(1885년)의 주인공 벨아미(미남 친구)는 천하의 난봉꾼이다. 벨아미는 자신의 상관의 부인을 유혹하기 위한 장소로 파리의 한 성당을 선택한다.


그러나 성당서 막상 연인을 만난 부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를 피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러 간다. 벨아미는 고해성사를 “영혼의 쓰레기통”이라 비웃는데, 그러지 않아도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부인은 결국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


19세기 과학의 시대에 접어들어 성당은 이렇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플로베르, 모파상 그리고 졸라 같은 자연주의 작가는, 사람을 본능, 유전, 환경에 지배를 받는 동물 같은 존재라 보고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도덕적 의미를 제거하며 기존의 종교적 권위를 부정한다.


인상파의 탄생 역시 19세기 사진기의 발명과 관련된다. 사진기가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정은 바로 다름 아닌 빛을 포착하는 과정이다. 인상파는 렌즈 중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인간의 눈에 의지해 영혼을 가진 카메라가 되고자 했다. 성당은 단지 이런 카메라의 대상일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스크바의 ‘스탈린 케이크’,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