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이곳을 떠나보려는 출발에의 충동이라고 한다. 이러한 충동은 젊은 시절에 강렬한 법이지만 평생을 지속하는 여진 같은 것이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도 이러한 출발충동의 대리적 충족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은 단순히 지금 이곳의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데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심층에는 에로스 충동이 잠복해있다고 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나그네와 늘 새 꽃을 탐하는 노랑나비 돈 후안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여인과의 스쳐가는 사랑 – 그것은 현실적이든 환상적이든 여행객의 로망일 수 있고 문학 작품에는 그러한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괴테의 영원한 청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여행에는 그보다 열 살 이상의 어린 소녀 미뇽이 함께 한다.
이태준의 <석양>(1942)도 일면 그런 성격을 가진 소설이다. 소설가 매헌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그는 벼르던 경주 여행을 홀로 떠난다. 이런 여행은 반드시 혼자 떠나기 마련이다. 나같이 여행을 늘 아내와 함께 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사건도 기대하기 어렵다!
매헌은 그곳 경주에서 고완품점(골동품 가게)을 둘렀다가 주인장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게 일을 보고 있는 미목이 청수한 처녀를 만난다. 매헌은 이것이 인연이 돼 딸의 동무라도 좋을 나이인 것 같은 이 처녀의 안내를 받아서 경주 기행을 같이 한다.
내가 경주 기행문들을 읽은 게 몇 개 안 되지만, 이 소설가와 고완품점 처녀가 둘러보는 고도(古都)의 풍경, 그리고 그 풍경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이 흘러넘치는 이 기행문은, 경주 기행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경주 왕릉의 봉분 위 소나무 가지에 두 남녀가 구두를 벗고 올라앉아 보는 무덤의 모습이 멋들어지다. “무덤이라기엔 선에 너무나 애착이 간다. 무지개가 솟듯 땅에서 일어 땅으로 가 잠긴 선들이면서 무궁한 공간으로 흘러간 맛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여행의 한 순간 같은 것이다. 매헌은 처녀의 부탁으로 그녀의 부채에다 옛 시인의 석양시 한 편을 써준다. “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석양은 한없이 좋으나 곧 황혼이 가까워 온다.) 귀여운 젊은 처자와 달리 매헌은 자신의 석양을 느낀다.
처녀에겐 청춘이 절정으로 올려달은 듯한데, 매헌에겐 늙음이 오고 있다. 물론 석양은 아름답다. 그러나 석양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것은 너무 속히 황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매헌은 이후에도 또 다른 아름다운 이성을 기대(?)하며 여행은 계속되지 않을까?
매헌의 경주 여행과는 아주 격이 다르게, 나는 50대 후반 시절 아내와 함께 캄보디아 패키지여행을 갔다가 좀 웃기는 경험을 당했다. 앙코르와트 고적지를 관광한 후 가이드가 여행객들에게 시원한 코코넛 음료를 마시는 곳으로 안내했다.
깜찍한 캄보디아 소녀가 네모 난 큰 칼로 코코넛을 능숙하게 자른다. 그 소녀가 자른 코코넛을 관광객에게 건네주면 우리는 빨대를 꽂고 먹는 것인데 소녀는 그 일을 하면서 관광객들에게 팁도 받는다. 관광객들 기분 좋으라고 모든 남자 관광객들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나도 ‘오빠’라고 불림을 당하면 낯이 간지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 소녀는 나를 흘깃 보더니 한국인 여성 관광객들도 다 듣는 앞에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여러 가지로 속상했다.
일단 그 많은 남자 관광객들 중 나를 정확히 변별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점, 그렇다고 소녀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는 점, 아마 그 소녀는 자기 딴에는 정확히 판단해 나름 예의를 갖춰 호칭한 거라 생각할 것이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에로스와는 전혀 무관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