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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에프 시절, 백석의 <여승>을 가르치며

by 양문규 Jul 02. 2023

백석 시인은 내가 대학원 공부하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인과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시인이 됐다. 참고로 우리 근대시인 중 가장 많이 연구되는 이를 순서 별로 나열하면 백석, 정지용, 서정주, 김수영, 김소월 순이다. 


백석은 시학적으로도 얘기할 거리가 많은 시인이지만, 여기서는 그의 시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백석이 활동하던 시기는 1930년대 중후반으로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즉 전통사회의 공동체를 해체 또는 붕괴시킨다. 백석 시의 주요한 주제는 이렇게 붕괴돼 가는 과거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백석은 그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근대는 전통사회에 비해 일면 발전, 진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대가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그의 시를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끈다. 백석 시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시와, 불행한 현실을 그리는 두 부류의 시로 나뉜다. 


<여승>은 후자의 시다. 이 시는 가족공동체가 붕괴돼 가는 식민지 아래 농촌현실을 그린다. 농민은 도시인들과 달리 오랫동안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만, 경작할 땅을 잃게 되든지 하면 살아갈 다른 방도를 찾는다. <여승>(1936년)의 지아비도 먹고살 길을 찾아 금광으로 떠난다. 


1930년대 당시는 일제가 군비조달을 위해 산금장려정책을 펴고 금값의 폭등으로 금광 개발 붐이 인다. 여인은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어린 딸을 데리고 옥수수 행상을 나서 광산을 전전한다. 그러나 딸마저 죽자, 여인은 결국 산사로 들어가 중이 된다.  


소리 백 마디 할 것을 열 마디로 줄이는 것이 시라 한다. 백석은 한 편의 소설도 될 법한 내용을 4연 12행의 짧은 시로 그려, “산문적 확장과 시적 응축의 긴장(tension)”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승> 말고도 당시 이태준의 단편 <밤길>」(1940년)도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을 그린다. 


<밤길>의 행랑살이하는 남자는 처자식을 주인집에 맡기고 인천 어느 곳의 새 집 짓는 공사장 일군으로 나선다. 남자가 일이 꼬여 품삯을 제대로 못 받아 집으로 속히 돌아오지 못하자, 살 길이 막막해진 아내는 애들을 주인집에 버리고 도망간다. 


주인집이 애들을 데리고 공사장에 나타나는데,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은 이미 병이 골수에 든 상태이다. 아이가 죽어 나가려 하자, 공사장 동료들이 남의 새 집을 짓는 일에 궂은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말에 죽어 가는 아이를 안고 남은 딸자식들을 데리고 빗속을 나온다.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밤길 빗속을 헤매다 끝내 죽은 아이를 물속 땅에 묻고, 남은 딸자식들 때문에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아비의 심정은 읽는 사람의 가슴까지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그려낸다.      


가족공동체 또는 민중이 한데 어우러져 살았던 공동체의 붕괴는 현대사회가 겪는 큰 비극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아이엠에프 사태 때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의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비극을 도처에서 목격했다. 


그 시절, <여승>이나 <밤길>을 강의하면서 학생들 앞에서 눈물이 나와 나 스스로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아이엠에프 역시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욱 강화된 강고한 자본주의 시장과 경쟁 시스템 속에 많은 이들을 절박한 생존에 몰리게 했다.  


<여승>과 <밤길>은 결코 과거 식민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고 아이엠에프 시대에도 어김없이 재연된다.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이상국 시인의 <물속의 집>(「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 수록)은 우리 시대의 통렬한 아픔을 그린다. 


아마도 아이엠에프가 터졌던 그해 겨울이었으리라! 빚에 쫓겨 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 영랑호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호수에 놔두고 간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와 청둥오리들은 하늘 어디선가 호수로 뒤뚱거리며 내리고 때로 조용히 별빛을 흔드는데, ‘물속의 집’에서는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호수의 인근 마을까지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자신의 뺨을 적신다.


1957년 북한서 출간된 백석 동화시집의 백석 초상1957년 북한서 출간된 백석 동화시집의 백석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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