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는 괴테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곳엔 괴테 광장도 있고 그의 동상도 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그가 태어난 4층 집은 2차 대전 중 폭격을 맞았다. 전쟁 후 재건돼 괴테 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돼 현재는 많은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괴테는 귀족은 아니고 시민계급 출신이다. 그럼에도 그의 집 건물을 둘러보면 그가 굉장히 부유한 집안 출신인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1층엔 주방과 식당이 있고 펌프가 전시돼 있다. 당시 주민들은 공동우물을 사용하나, 괴테 집안은 주방에 펌프를 설치해 사용했다고 한다.
3층 서재에는 괴테의 아버지가 소장했다고 하는 2천 권의 책 중 일부가 전시돼 있다. 괴테 아버지의 집안은 외식업과 호텔업을 하는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유력한 자산가 집안이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도 힘을 쏟아 직접 괴테와 그의 여동생을 가르쳤다.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가정교사를 둬 가르쳤다. 서재 한쪽에는 길가가 잘 보이도록 새로 창문도 냈는데 창문으로 거리에 어디쯤 괴테가 오는지 지켜보기도 했단다. 괴테는 이런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창문서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 집에 가기도 했다.
전시물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역시 부잣집 마나님이었던 괴테 외할머니가 괴테와 그의 여동생에게 선물한 인형극용 무대다. 어린 괴테는 각본을 직접 써서 인형극을 연출하고 어떤 때는 인형극 무대를 들고나가 이웃 아이들에게 공연도 했다고 한다.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도 주인공 빌헬름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날 인형극을 상연한다. 어린 빌헬름은 남몰래 극본을 반복해 읽고 외우고, 자신이 인형극 속 인물들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살아 움직이게 조종하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괴테는 독일의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이다. 괴테와 같은 시기에 살아 그와 교류도 가졌던 베토벤은 독일의 고전음악을 대표하는 이다. 괴테와 베토벤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일종의 라이벌적 의식도 있었나 보다.
가난한 시민계급 출생의 베토벤은 귀족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반면 부유한 시민계급 출신의 괴테는 귀족들에게 공손하고 협조적이었다. 베토벤은 이런 괴테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그 두 사람은 독일 국민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영웅이다.
어디서 이런 얘기를 읽었다. 독일의 한 노인이. 맥주가 여러 잔 들어가자 자신의 유년시절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소박한 중산층이었던 온 가족이 베토벤 3번 <영웅교향곡> 마지막 악장 선율에 붙인 비스마르크 찬가를 부르곤 했다.
가족이 모여 둘러싼 피아노 위에 놓인 괴테의 흉상은 그런 모두를 흡족한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는 회고다. 근대 독일을 걸어갔던 독일인들에게 괴테와 베토벤은 독일 국민이 위대한 국민임을 웅변해 주는 인물이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 후반부를 보면, 노년의 파우스트는 거대한 규모의 해안 간척사업을 벌이는 토목 사업가로 변신한다. 괴테 스스로가 실제 베네치아의 수리 기술을 깊이 연구했고 독일의 자유시 브레멘 항구의 확장 공사를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근대 초기 간척지나 운하를 개발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힘든 작업에 속하는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근대의 영주 또는 국가가 개척한 간척지를, 백성을 위해 넓은 복지의 땅을 마련해 준 인간 정신의 걸작품으로 예찬한다. 파우스트는 근대 독일이 걸어갈 길을 일깨워준다.
베토벤의 음악은 프랑스혁명 이후 전제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돼 있다. 근대 부르주아 소설과 베토벤 교향곡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발전과 성장, 변화의 역동적 과정이라는 생각의 씨앗이다.
독일이 통일 제국을 이루고 세계의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괴테와 베토벤은 독일국민의 든든한 정신적인 후원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독일은 1차 대전의 패배에 이어서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괴테의 ‘파우스트’는 개인이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이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자기실현의 한 과정이지, 바그너의 음악 같이 독일제국의 확장 야욕이나 국수주의를 지향했던 건 아니다.
베토벤의 9번 합창 교향곡은, 프랑스혁명 이후 그가 지지한 공화주의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극복하려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히틀러 시대의 9번 교향곡은 파시즘과 전쟁의 공격성을 찬양하는데 활용된다.
괴테 하우스를 갈 때 구시가지 중심지인 뢰머 광장을 거쳐서 갔다. 광장엔 무장한 독일 경찰들 다수가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나치즘을 추종하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시위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