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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n 18. 2019

그랜드캐년 노스 림과 그린리버의 추억

캐년을 여행하면서 의외의 행복감을 안 가져본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아주 별 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이후에는 두고두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은 그랜드캐년 공원 안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가능했다. 계획성 없이 다니는 내 주변머리론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공원 안에선 못 자게 됐으나 대신 그 비스름한 건 해봤다.


그랜드캐년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은 대개 로스엔젤리스 쪽으로 들어와 그랜드캐년의 남쪽(South Rim)으로 가는데 그쪽엔 공원 주위로 숙소가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 같이 솔트레이크 쪽에서 출발하여 그랜드캐년의 북쪽(North Rim)으로 가게 되면 그곳은 남쪽보다 산세도 험하고 공원 밖에는 숙소가 거의 없다. 우리로 치자면 외설악 쪽과, 내설악 쪽의 분위기가 다른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 보다도 훨씬 다른 게 그랜드캐년 북쪽은 춥고 눈이 많이 내려 5~10월에만 개방하는데 반해, 남쪽은 지형이 평탄하고 날씨가 따뜻해 연중 관광객이 찾는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등반을 해서 온 독일인 등산객을 만났는데 그이 말로도 경치는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좋다고 했다. 


북쪽으로는 숙소를 찾기 어렵다는 말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전 최소한 숙박할 곳은 알아보아야 하겠기에 트리플 에이를 직접 찾아갔다. 당시만 해도 지금 같은 온라인 여행업체가 흔치 않았다. 그곳에서 소개받은 숙소가 바로 그랜드캐년 노스 림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통나무 오두막집(lodge)이다. 유타에서 그랜드캐년을 가기 위해서는 애리조나 주 경계를 넘는다. 그 넘어가기 직전 카우보이 축제가 열리곤 하는 커냅(Kanab)이라는 마을이 있다. 트리플 에이 측의 말로는 이 커냅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그랜드캐년까지도 세 시간 넘어 걸리는데 그 세 시간 사이로 특별한 도시나 동네는 없으며, 따라서 그 통나무집 말고는 어떠한 숙박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서 강릉 가는 사이에 아무런 숙소가 없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게 애리조나로 넘어서니 누구 말마따나 시간도 멈추고 색과 빛도 멈춰 있는 거대한 사막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내 어렸을 때 가게를 하던 큰아버지께서 물건 정리를 하면서 흥얼거리며 부르시던 “아리조나 카우보이 …… 역마차는 달려간다.”라는 유행가가 있었는데 애리조나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한국서 지프 형 차를 새롭게 출고할 때마다 차 이름을 왜 애리조나의 투산, 뉴멕시코의 샌타페이 등의 지역 이름에서 따왔는지 그 이유를 알 듯싶었다. 이런 황량한 곳을 힘차게 질주할 수 있는 오프로드 차의 이미지 때문에 그랬으리라.  


어쨌든 역마차는 아니고 승용차를 타고 힘겹게 달려 도착한 곳이 그랜드캐년 노스 림을 코앞에 둔 통나무집이었다. 저녁 해도 떨어지고 9월이었지만 산골의 밤은 아주 늦은 가을의 날씨였다. 체크인을 하는 사무실의 벽난로엔 벌써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고, 커다랗고 멋진 뿔을 가진 박제된 엘크 사슴이 벽에서 머리를 쑤욱 내밀고 있는 것이 산장의 분위기를 흠씬 풍겼다. 홀에는 애리조나를 상징하는 사막 전갈의 표본도 있었다. 우리 가족 말고 통나무집에는 노인네 부부만이 묵고 있었다. 그들은 저 기력에 어떻게 운전하며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싶게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지나간 인생을 음미하듯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침대와 화장실만 있는 숙소였지만 애들은 지루한 여행 끝에 더블베드에서 쿵쿵 뛰며 놀았다. 이슥한 밤에 문 열고 나서면 하늘의 별들은 기울어 흐르고, 이름 모를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와 숙소 안에서의 아늑함은 갑절로 되었다. 왜 그런 동요가 있지 않은가!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부엉 춥다고서 우는데/우리들은 할머니 곁에/모두 옹기종기 앉아서/옛날이야기를 듣지요” 그랜드캐년보다는 통나무 집 안의 행복감이 오래도록 감미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 돌아가면 가족과 자주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이 시절 미국 여행으로 끝이었다. 


한편 아치스 캐년과 캐년 랜드를 갈 때는 솔트레이크 동쪽의 콜로라도 방향으로 달린다. 이 캐년들은 사막 가운데 놓여 있어 9월 말이었음에도 모든 대지가 태양으로 달궈져 있다. 캐년의 마을들조차 외로운 하늘 아래, 붉은 흙, 붉게 타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서부영화 속 ‘황야의 무법자’가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마을이다. 이후 여행했던 캐나다 로키의 캐년은 이런 미국의 로키 분위기와는 전연 달랐다. 캐나다 로키는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이뤄진 호수와 강의 풍부한 수량이 많은 수목을 키워내 장엄은 하되 훨씬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캐년은 오래전 먼 고대의 지각운동이 남겨 놓은 거대한 흉터 자국과도 같았다.  


아치스 캐년에서 솔트레이크로 돌아올 때, 사막과 캐년에 지친 우리 가족은 강물이 흐르는 그린리버(Green River)라는 마을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기 위해 그곳 공원을 둘렀다. 여기선 공원을 찾으면 십중팔구 피크닉 에어리어(picnic area)가 있다. 그리고 피크닉 에어리어에는 어김없이 여섯 명 정도가 앉아서 식사하기에 딱 맞는 규격의 간이용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다. 황량한 사막 풍경만 보고 가다가 숲과 강을 끼고 있고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단풍이 들어가는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을 찾아 한적한 그곳서 식구들끼리 식사를 했는데, 아직도 그곳 숲의 향기를 기억할 수 있다. 공원 끝 편의 교회 앞마당에는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나왔는지, 몇 명의 젊은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눈부신 고요 그 자체였다. 우리는 아치스 캐넌을 다녀오면서 우스꽝스럽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적한 시골 마을 공원에서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전기밥통의 밥을 꺼내 김치찌개에다 쇠고기 장조림을 곁들여 식사를 했던 추억이다. 


그린리버 마을 어귀를 빠져나올 때 시골 할머니가 노상에서 파는 칸타로페(cantaloupe) 과일을 사 먹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칸타로페는 멜론의 일종인데 미국에 와서 처음 먹어본 과일이다. 미국 온 이후로 이미 슈퍼마켓에서 사 먹어보긴 했는데, 할머니한테 산 것은 맛과 신선함에서 슈퍼마켓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여행길에 맛봤던 그 달콤함이란. 그래서 몇 개는 남겨서 이웃에게 선물을 했다. 그린리버의 따가운 햇볕과 건조한 바람 속에 키워진 것이라 당도가 유난히 높았던 것 같다. 과일을 파는 그 할머니는 한국 농촌의 할머니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얼굴에 볼우물과 주름이 잔뜩 파여 있고 손등과 마디에서도 고된 노동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한테 받은 달러를 꼬깃꼬깃 주머니에 챙기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살이가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국문과 제자 이홍섭 시인은 그의 시에서, 사람들이 걸어서 하늘까지 가려면 누구나 마음에 풍경(風磬) 하나쯤은 달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캐년의 장엄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그랜드캐년 노스 림 산자락의 아늑한 통나무집, 그리고 아치스 캐년 근처 그린리버의 고요한 강마을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워질 때 저 멀리서 물컹하며 들려오는 풍경소리 한 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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