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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l 07. 2019

모르몬교와 북한

브리검영 대학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서의 행정절차를 밟는 인터내셔널 오피스였다. 그런데 이 오피스의 로비 벽에 메카에 운집한 이슬람 성도들을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모르몬 학교의 사무실에 이교도의 종교의식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는 게 잘 이해가 안 갔다. 모르몬 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다. 그래서 이 사진도 그런 것의 일환이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귀국하고 나서 학교 신문사에서 칼럼 하나를 부탁받았을 때 종교 상호 간의 관용성을 주제로 이에 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 사진은 메카의 카바 신전을 도는 ‘하지’ 순례라는 행사를 찍은 사진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그곳의 모르몬 교인에게 이에 대해 직접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지 순례는 기독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을 재현하는 의식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이를 이어받았다는 모르몬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이다. 그 이상의 얘기를 내 실력으로 하긴 어렵고. 이 사진은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모르몬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지닌 건 확실한 게, 유타 체류 시 내가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모르몬 신자들은 내게 더 이상 특별한 전도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모르몬 종교의 관용성을 주제로 칼럼을 쓰면서, 모르몬의 사회 선교활동에 대한 얘기도 덧붙여했다. 모르몬 신도들은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헌금, 십일조 등과 같은 기부금 활동을 활발히 한다. 그들의 기부금은 브리검영 대학의 재정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브리검영 대학에는, 자체 내 채플 행사도 하고 농구 경기장으로도 사용되는 엄청나게 큰 메리어트(Marriott) 센터라는 건물이 있다. 이것은 메리어트 호텔 설립자로서 모르몬 신자인 메리어트(J. W. Marriott, 1900~1985)의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이 대학의 '메리어트 스쿨(Marriot School)'은 미국 내 MBA 순위 중 꽤 높은 편으로 들었다. 모르몬교의 기부금은 비단 학교만 아니라, 사회선교 활동에도 활발하게 쓰인다.  


2001년 당시 모르몬교는, 미국 대통령 부시가 ‘악의 축’이라고 불렀던 북한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르몬 교단은 미국 내 민간단체 중 북한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종교단체고, 북한 당국에서도 모르몬을 굉장히 신뢰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르몬의 이러한 활동은 장래 본격적인 북한 선교 전략의 일환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모르몬교 역시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처절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초미의 일이 무엇일까 하는 점에서 그들의 북한 돕기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모르몬 선교사 활동을 했던 유타 주립대 의과대학의 킴블 박사는 당시 북한을 방문해 황해도 지방에서 의료 시찰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목격한 얼굴 모양까지 비뚤어질 정도로 굶주리고 있는 북한 어린애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얘기하던 끝에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했다.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등이 있는 황해도는 북한의 곡창지역이다. 그곳 사정이 그러할진대 딴 곳은 말하여 무엇 하리. 킴블 박사의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서 남한의 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화가 났다. 더욱이 북한으로 보낸 식량이 군용미로 전용되는 것이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하면서, 북한에게 뭐만 준다면 그것을 꼭 ‘퍼준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등 인색함을 드러내며 몽니를 부리는 우리 남한 형제들의 야박한 모습을 떠올리며 이역만리 미국서 우울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킴블이 시찰한 곳이 북한의 황해도 지역이라는 게 더욱 가슴 아팠던 건 김소월의 <나무리벌 노래>(1924)라는 시가 생각나서이기도 하다. 이 노래의 무대인 ‘나무리벌’은 황해도 재령 지방의 ‘여물(餘物)리’를 가리킨다. 곡식이 먹고도 남을 만큼 넘치는 곡창지대라 그곳 이름이 ‘나무리벌’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궁장토 즉 왕실 농장이었는데, 일제시기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토지로 수용된다. 동척 시기 조선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대화되면서 400여 명의 소작인이 동척의 일본인 지주와 충돌하고 쟁의에 실패하여 결국 370여 명의 소작인이 만주로 이산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 소월은 바로 이 황해도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떠난 이주민들의 고통과 한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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