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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l 12. 2019

국문과 선생의 영어 공부

외국 여행을 하게 되면 두려운 것 중의 하나가 현지에서의 의사소통 문제다. 미국서 한동안 살게 된 나 역시 이 점이 걱정이 됐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먼저 갔다 온 선생들은 미국서 영어를 할 일은 정작 별로 없다는 얘기를 해줬다. 또 내 정도 영어실력이면 숫제 보디랭귀지로 하는 게 낫다는 조언도 해줬다. 미국에 도착하고 며칠 안 돼서 아내가 나한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여보, 난 당신이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어!”


물론 와보니 영어를 쓸 일은 없었다. 미국인 학과장을 만나기 전 인사말 등을 준비해갖고 갔다. 그런데 막상 만났을 때 그이에게 영어로 말 한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그이는 아주 능숙한 한국말로 “제가 한국어과 교순데 한국말을 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는 바람에 오히려 상대방에게 “한국말을 참 잘하신다.”라고 칭찬만 해주고 왔기 때문이다. 이후 만난 한국어과 학생들은 나를 보고 “한국말 너무 잘하십니다.”라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칭찬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국서 살아도 영어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영어가 하나도 늘지 않고 귀국을 하게 되면 너무 보람 없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브리검영 대학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는 데가 있긴 한데, 수강생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지레 포기했다. 미국까지 와서 한국 사람들과 같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 객쩍은 일 같고 결정적인 이유는 내 실력을 수강생의 대부분인 교환교수 부인 또는 유학생 부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저녁에 동네 근처에 중학교 교실을 빌려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영어교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그곳을 다니기로 했다. 세 달에 20불의 수업료를 내는데, 그것도 출석만 착실히 하면 재등록할 때는 10불을 깎아주니, 거저 다니는 셈이다. 나중에 보니 강사들이 보수가 적어서인지 자주 빠지기도 하고 빠질 때는 정체불명의 친구들이 와서 가르치기도 하는 등 20불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모르긴 몰라도 강사들은 영어만 할 줄 알면 아무나 와서 가르치는 것 같았다.  


그 영어교실에 처음 등록을 하러 갔더니 라티노들이 바글바글 댔다. 유타는 원래 멕시코 땅이었다. 미국이 옛날 멕시코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전쟁을 하고 난 뒤 멕시코 사람들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빼앗는다. 그게 오늘날 유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뉴멕시코와 콜로라도, 네바다, 애리조나 땅이다. 어떤 개그맨이 스페인 말을 장난으로 흉내 낸 것이긴 하지만, “꼬까꼴라 까스떼라 아싸라비아”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서 학급 배정 시험을 치렀다. 

구두시험을 치를 때는 다짜고짜 ‘나는 브리검영 대학을 방문한 교수인데 한국문학 전공 교수라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고 선수를 쳤다. ‘교수’라는 말에 악센트를 줬더니, 담당자가 필기시험 점수를 참조하여 고급반으로 가라고 했다. 내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고급반으로 가려고 했냐면 함께 배우러 다니기로 한 아내와의 차별화를 위해서였다.    


이후 나는 저녁을 먹고 나면, ‘노느니 염불’이라고 영어를 배우러 다녔다. 처음에는 재밌기도 했다. 영어 공부도 공부지만 이전에 이렇게 많은 라티노들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멕시코 출신도 있지만, 그 밖에도 옛날 지리 시간에나 배운 엘살바도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등 중남미 각 나라서 온 사람들이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들이 하는 영어란 미국 사람들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어 그들이 여기에 온 사연을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하겠고, 대부분이 불법이민 내지 임시 체류를 하면서 영주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자들로 보였다.

 

젊어서 고생 꽤나 한 듯싶은 어떤 멕시칸 할아버지는 이미 미국에 온 지 오래되어 영주권도 있는데 취미 삼아 영어를 배우러 다녔다. 이 할아버지 영어는 진짜 못 알아먹겠는데, 신기한 건 스페인에 선교사로 갔다 왔다는 선생은 내 말보다는 그 할아버지 말을 훨씬 잘 알아듣고 둘이서 신나게 대화를 한다는 점이다.    


이러고저러고 수업 초기 이들 라티노 클래스메이트들과 친해져 보고 싶은 기대도 가졌지만, 그게 힘들었던 게 그들 대부분은 슈퍼마켓 등지서 허드레 일을 하는 등 생활에 쫓기고 있는 자들인지라, 나와는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나의 신분에 대해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았는데, 이 자들 앞에서 비지팅 스칼라 어쩌고 하는 말이 너무 한가한 얘기인 듯싶어 삼갔다.     


언젠가는 수업 중 시사적인 문제를 주제로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마침 9‧11 테러가 일어났던 시기였는데, 나는 신문에 난 기사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하여 9‧11 테러로 미국인들의 반(反) 아랍 정서가 증폭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열심히 정리해 와서 발표를 했다. 일부 학생들은 박수까지 쳐줬다. 사실 이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수업 중에 선생이 빙고 게임 같은 것을 시키면서 게임 규칙을 설명해줄 때, 라티노들은 잘 알아듣고 척척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 꼭 반편 같이 행동한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어교실을 다니기는 했는데 어떤 때는 영어가 느는 것도 같았지만,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았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내 영어 실력은 미국 가기 전이나 후나 똑같았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미국 가서 공부를 해 학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서 살아본 몇 가지 얘기들을 하고는 있지만, 이는 그저 관광객처럼 살다가 보고 온 것을 얘기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참, 깜빡 잊어버릴 뻔했던 얘기가 있다. 내가 동네 영어교실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가  한국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앞서 말했다. 그럼에도 어느 교환교수 부인이 용케 쑤시고 알아서 내가 수강하는 클래스에 나타났다. 그분은 영어도 잘하고 활달해서 라티노 아저씨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가 영어 못하는 것을 라티노 아저씨들이 아는 것이야 아무 상관없지만, 그 부인을 통해 지역 한인사회는 물론 고국에까지 전해지는 건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아내가 그 부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은 내가 수업시간에 얼마나 말귀를 못 알아먹고 헤매는지를 얘기했나 보다. 아내 역시 그 말을 내게 돌려가며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나를 위로하는 말을 했는데, “원래 당신은 한국서도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었다.”며 대수롭게 생각지 말라고 했다. 아내의 교묘한 보복 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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