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미국 유타에서 보냈었다. 유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협곡(캐넌)들이 많이 있다. 그중 내가 가본 곳은 브라이스(레드) 캐넌과 자이언스캐넌, 그리고 아치스캐넌 등이다. 유타뿐 아니라 위로 와이오밍의 옐로스톤이 있고, 아래로 애리조나의 그랜드캐넌도 있다.
유타에서 안식년을 지내지 않았더라면 평생에 그 여러 캐넌을 다 둘러보기가 쉽지는 않았을 듯싶다. 브라이스캐넌은 광막한 대평원에 우뚝 우뚝 선 돌탑, 돌기둥, 돌 성루 등이 줄지어 이어져 거대한 바위 군을 이루고 있다.
20억 년 전 형성된 콜로라도 고원이, 6,500만 년에 걸친 풍화작용을 통해 이뤄진 것이란다. 돌기둥의 모습뿐 아니라 색깔도 적색, 갈색, 또는 크림색 등으로 다양하고 화려하다. 저녁노을에 비끼면 더욱 신비하고 아름답다는데, 아쉽게도 이 석양의 광경을 보지는 못했다.
아치스캐넌에는 자그마치 2천여 개의 아치 바위가 있다. 아치는 한마디로 구멍이 뚫려 있는 바위다. 이 구멍이 사람들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는가 하면(델리케이트 아치), 큰 구멍의 아치는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이런 아치들 역시 수십만 년 동안 거대한 사암 벽이 풍우에 깎여 생겼다. 큰 아치의 경우 마치 하늘을 향해 열린 거대한 창문 내지는 거울 같다. 그래서 그 아치들을 윈도아치 또는 랜드스케이프 아치라고도 부른다. 한 바위에 구멍이 두 개가 뚫린 더블아치도 있다.
캐넌의 맏형 격인 그랜드캐넌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남쪽의 입구가 아닌 북쪽(North Rim)으로 가서 보았다. 북쪽의 경관이 더 낫다고 하는데, 뭣보다도 사람들이 드물어 광대한 적막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캐넌의 장관이 압도적이었다.
지질학자들 사이에선 이 캐넌들이 누구는 몇 십억 년, 누구는 수 십 만년, 누구는 수백 만 년에 걸쳐 이뤄진 것이라며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세월이든, 100년을 넘어 살지 못하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이미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일부처럼 생각된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많이 본다. 미국의 대협곡 풍경들은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적합지 않다. 아름다움의 범주에는 ‘숭고미’라는 것도 있는데, 캐넌들은 바로 ‘숭고한 ‘ 또는 숭엄한’ 아름다움이다.
이는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성경 구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와 같이, 신자들을 압도하고 전율케 하는 그런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대개 숭고란 유한한 인간이 무한성과 신적인 위대한 모습을 체험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인간과 신을 나누는 가장 본질적인 경계는 죽음이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 신적인 영원성에 참여하거나 이를 체험할 때 숭고미를 체험하게 된다. 숭고함은 무한한 우주의 힘, 가령 대협곡과 같은 자연의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난다.
미국의 장엄한 캐넌들을 보면서 나는 연약하며, 한시적인 인간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 서부극에서의 캐넌은 이와 다르다. 나는 브라이스캐넌을 지날 때 중학교 때 영화관에서 본 서부 영화 <마켄 나의 황금> 장면이 떠올랐다.
불쑥불쑥 솟은 붉은 절벽과 바위 어디선가 인디언이나 멕시코 악당(?)이 숨어서 망을 보고, 그 사이의 사막으로 말을 탄 서부의 사나이들이 황금을 찾아서 질주한다. 이들은 모두 멋지고 건장한 백인들이다. 서부극은 이를테면 미국의 또 하나의 신화다.
대지를 내달리고, 말 타고 질주하며, 추격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새로운 영토를 향해 밀고 나가는 진보, 시간을 따라 앞으로 위로 향하는 진취적인 동력을 제시한다. 그 장면에서 바로 캐넌의 풍경이 소환된다.
붉은 흙과 붉게 타는 듯한 절벽, 그리고 외로운 하늘! 캐넌의 생김새 자체가 남성 신체의 탄탄하고 근육질에, 단단하고 팽팽함을 보여준다. 서부의 사나이들은 이런 거칠고 다루기 힘든 대지와 맞서 활기차고 낙관적인 비전을 만들어 나간다.
서부영화는 누구 말대로 미국식 자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판타지를 재생산해낸다. 서부극서 캐넌은 결코 인간의 연약함을 환기하는 숭고한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인간이 대결하고 극복해야 할 정복의 대상이다. 세계를 향한 미국 제국의 질주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