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문학 속 싱커페이션 이야기

by 양문규

초등학교 6학년 때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금강산>을 배웠다. 그때 이 노래에 싱커페이션(당김음)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싱커페이션이 가져다주는 변칙 박자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운 하이킹을 떠나는 기분이 절로 들었다.


노래가 강박에서 시작하지 않고 약박에서 시작돼, ‘금강산 찾아가자’와 ‘볼수록 아름답고’, ‘이름도 아름다워’의 부분을 뒤에 악센트를 넣어 부르는 게 꽤 재밌었다. ‘금강산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과, ‘볼수록 아름답다’는 느낌이 심장의 박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조금 커서는 이 싱커페이션이 재즈 쪽에서 즐겨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행가 가수들이 동요나 클래식 성악곡을 부르면 다리를 저는 것 같은 박자를 주는데 바로 싱커페이션을 넣어 부르기 때문이다. ‘라 콤파르시타’를 들어보면 그런 느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커서는 고전 음악가들도 이 싱커페이션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들에게서는 보이지 않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만 해도 이 싱커페이션이 나타난다. 베토벤은 이미 고전파 음악에서 낭만파 음악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었다.


문학에서 시 문학은 우선 뜻이기 전에 리듬, 소리의 즐거움으로 나타난다. 조선 시대만 해도 시조는 읽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불려졌다. 고등학교 시절 과거 학교 선배들은 강당 무대에서 셰익스피어의 시극 <햄릿>의 일부를 외워 멋지게 읊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시에서는 리듬이 생명인지라 시학 연구자들은 이에 관심을 갖는다. 김소월은 민요조의 서정시를 썼다. 민요는 3 음보를 기조로 하는 고정된 형식을 갖기 때문에 김소월의 시는 단순한 반복적 리듬을 가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김소월은 민요조의 리듬을 아주 재능 있게 활용한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 위치한 인간의 고독함을 노래한다. 리듬이 느릿하고 편안하다. 어떻게 들으면 지루할 법한 시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식의 리듬이 흘러간다. 그런데 4행에서, ‘봄가을’이라 하지 않고, ‘봄’과 ‘가을’의 위치를 바꾸고 줄여 ‘갈봄’이라고 했다. ‘갈봄’이 못갖춘마디가 되면서 싱커페이션이 생기고 리듬의 변화를 준다. 그럴싸한 설명이다.


싱커페이션이 거기서 나올 줄이야! 니체는 인간이 자기의 소망을 신들에게 깊이 명심시키고자 할 때 리듬을 빌린다고 했다. 그래서 마법의 노래나 주문이 시의 원형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무당은 격렬한 리듬이나 기묘한 선율에 몰입하면서 다른 세계와 교신하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농사월령가> 같은 노래는 농사일을 재미있게 가르치고자 4‧4조 리듬을 쓴다.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인 나는 은퇴 후, 농사짓는 아내를 돕느라 한참 욕보고 있다. 땅 파는 곡괭이질 같은 일들은 단순하지만 오랜 시간 하려면 제법 힘이 든다.


내 나름 장단에 맞춰 땅을 파고 일정한 시간을 둬 강약을 주면서 번갈아 하면 일의 수고로움을 던다. 어떻게 보면 리듬은 인간의 본성 자체와 동시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교 다닐 때 시를 암송하게 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좋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시를 리듬에 맞춰 읊다 보면 저절로 외워지기도 한다. 실제로 시는 기억술의 한 방편으로 발달되기도 했다. 우리 현대시는 대개 벙어리 시인과 귀머거리 독자만 있을 뿐이다.


나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다 외우게 된 시들이 몇 개 있다. 아놀드는 교양(비평)이란 지금까지 알려진 최고의 시들을 많이 기억해 뒀다가, 이를 새로운 작품을 평가하는데 시금석으로 삼는 거라 했다. 몇 개의 시밖에 못 외우는 내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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