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 청록파 시인 박두진 선생의 수업은 지루했다. 목소리도 작고 수업 내용이 두서도 없어 강의 내용을 온전히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원 가서야 몇 명 안 되는 학생들과 함께 선생의 수업을 들으면서 비로소 선생의 진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우선은 수많은 시들 중 가치 있는 시를 선별하는 선생의 안목이 놀라웠다. 또 선생의 창작담과 함께 당신 주변 시인들의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이렇게 저렇게 가늠해보기도 했다.
가령 <해>라는 시는 해방 직후 발표됐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시절이었는데 문학가 동맹 사람들이 선생을 찾아와 물었다고 한다.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로 솟는 붉은 해는 압제서 벗어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게 아니냐고?
선생은 그에 대해 뭐라 대꾸를 하진 않았나 보다. 단지 그 시를 썼던 시절 선생이 첫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는 어디서 전해 들은 바가 있다. 청록파의 또 다른 시인인 박목월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와 친해 청와대를 자주 들어 다녔나 보다.
당시 거리에서 우연히 목월을 만난 선생은, “요즘 얼굴이 좋아진 것 같은데 무슨 운동을 하냐?”라고 물었다. 목월은 자격지심에 질문을 오해하여 “운동은 무슨? 새마을 운동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건 아니고…”라며 엉뚱한 답변을 했다고 한다.
목월이 영부인과 친한 덕에, 여러 시인들이 시집을 출간할 때 청와대로부터 많은 재정적 도움을 받기는 했나 보다. 이 글에서는 선생이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는 첫 시였던 <묘지송>에 얽힌 당신의 회고담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1939년 새로 창간된 <문장> 지는, 세 차례의 시 추천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풍의상>이 먼저 추천된다. 선생의 <묘지송>은 그 다음번으로 추천되는데, 추천 완료는 선생이 먼저 하게 된다.
선생은 당시 세무서를 다니면서 지금의 방통대라고나 할까 통신 수업을 받는 학생이기도 했는데 ‘문청’으로 시인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문장>지에 응모하고 나서 어느 날 종로의 서점을 둘러 잡지를 들춰 보니 아마 먼저 추천된 조지훈의 시가 눈에 띄었나 보다.
선생은 당신의 시는 추천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누가 그런 사실을 알고 비웃기라도 할까 싶어, 사람들 눈을 피해 전차도 타지 않고 골목길로만 걸어서 아현동 방향의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묘지송>은 곧이어 추천된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정지용은 선생의 이 시를 추천하면서 조지훈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격찬을 한다. 지용은, <묘지송>이 묘지와 죽음을 노래한 시임에도, 시인의 유유히 펴고 앉은 시적 자세가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없다고 했다.
지용은 선생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졌냐고 물어봤단다. 선생은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매일 잠자리 들기 전 성경을 읽는다고 말했다. 지용 왈, 시에서 분명 기독교 신앙의 느낌이 나는데 그걸 직접 드러내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단다.
이 시는 죽음과 무덤의 평화로움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동그마한 무덤의 금잔디가 기름지다. 무덤 속 해골은 어둠에서 ‘하이얗게’ 빛나고, 냄새는 향기롭다. 주검은 무덤 속을 비춰줄 환한 태양이 그립기는 하다. 그러나 태양이 비추면 그걸 어찌 무덤 속이라 하랴.
대신 잔디의 할미꽃과 멧새들 우는 소리, 그리고 봄볕이 주검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묘지송>에선 죽음이란 없다. 단지 살아가는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그것도 평온하게 바뀔 뿐이다. 죽음은 어쩌면 세상에 가장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선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선생은, <묘지송>의 시상을 얻기 위해 찾은 곳이 경기도 양평 양수리라 했다. ‘두물머리’라고도 부르는 지금의 그곳이다. 우리 대학 때만 해도 수련회 행사로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열차를 타고 그곳의 양수리 또는 국수리 역을 내려 자주 찾았다.
지금이야 양평은 대처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밤새 술을 먹고 새벽녘에 나가면 물소리는 안 들리지만 오히려 강변의 물안개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아주 한적한 시골이었다. 박두진 선생이 찾았던 1930년대 후반의 양평이야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중앙선의 청량리-양평 구간이 1939년 4월 개통됐다고 하니, 선생이 그걸 이용해 양평을 갔었을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선생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묘가 있는 곳에 누워서 시를 구상했다고 한다. <묘지송> 시 마지막에 생기를 주는 것은 새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이다.
묘지의 멧새들이 우는 “삐이삐이 배, 뱃쫑! 뱃쫑!”은 선생이 하루 종일 양수리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얻어낸 시구다. 강물이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묘지 위 풀과 꽃을 애무하는 듯한 산들바람을 벗 삼아 땅속에 누워 영원히 잠을 자며 꿈을 꾸는 것은 평화스러운 일이다.
더 근심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생전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다. 영부인 일가가 양평 땅서 벌이는 탐욕은 끝이 없어 보인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그러한 땅에 얽힌 욕망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