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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크라쿠프와 아우슈비츠

by 양문규

폴란드 출신 음악가 쇼팽에게는 두 개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이 있다. 쇼팽 자신의 이루지 못한 청춘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이 두 곡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이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크라코비아크>라는 역시 피아노 협주곡 형식의 작품이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들은 다 좋은데, 이 <크라코비아크>는 특별히 폴란드 크라쿠프 지방의 민속춤곡을 기조로 하고 있다. 언젠가 폴란드를 여행하게 된다면 크라쿠프를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남부의 내륙 깊숙이 있어 우정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마침 베를린을 관광하고 크라쿠프로 가는 싼 비행기 표가 있어 그곳을 갔다가 거기서 다시 기차를 이용해 프라하로 갔다. 현재 폴란드의 수도는 바르샤바이지만, 크라쿠프는 11세기 이후 약 600년 동안 폴란드 왕국 전성기 시절의 수도였다.


크라쿠프에는 역대 폴란드 국왕들이 거주한 바벨성과, 바르샤바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왕들의 대관식이 치러진 화려한 바벨대성당이 있다. 크라쿠프는 위치상 서유럽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놓여있어, 도시 곳곳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과 요새들이 아직 남아 있다.


성문.JPG 현재 크라크푸의 성문 벽에선 평화롭게 그림들이 판매되고 있다.


올드타운 광장에 있는 마리아 성당의 첨탑에서는 매시 정각에 나팔 소리가 들린다. 13세기에 타타르족이 주력이 된 몽골 군대가 크라쿠프를 침입했을 당시, 적의 화살에 숨지면서도 나팔을 불어 침입을 알린 파수병에 대한 유래가 있는 나팔 소리다.


나팔수는 곡이 끝나기 전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부터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죽기 직전 연주한 부분까지만 나팔을 분다고 한다. 이러한 비장한 전설도 있거니와, 당시 몽골 군대의 침입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유럽인들 전체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화염과 유혈이 낭자한 학살극을 자행한 몽골 군대를, 신이 내린 형벌이라 여겼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한 영국의 철학가 베이컨조차도 몽골군대를 최후의 공포를 수확하기 위해 찾아온 반(反) 그리스도 병사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한편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은, 16~17세기 서진해 유럽을 통째로 이슬람 세계로 만들려 한다. 크라쿠프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이에 맞서 싸운 도시다. 크라쿠프는 유럽 쪽에서 보면 몽고와 오스만터키 등 유라시아 제국의 세력을 막는 최전선이었다.


마리안 성당.JPG 나팔수의 비극적 전설이 있는 마리아 성당


유럽은 자신과는 다른 문명과 종교로부터 자신의 기독교 문명을 지키고자 했고 이렇게 지킨 자신들의 문명을 긍지로 삼았다. 그런데 거꾸로 유럽과 기독교 문명은 아시아‧아프리카 및 신대륙을 침략하고 식민지 개척을 하면서 이번에는 ‘유럽중심주의’를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유럽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신들 문명에 내재한 야만성과 위선, 휴머니즘의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내지만, 유럽 대륙 안에서는 그 진실의 맨몸을 숨겼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은 일거에 그 야만성의 베일을 벗겨 놓는다.


크라쿠프에서 100km 정도 떨어지고, 버스로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폴란드 지명으론 오시비엥침, 독일식 이름으론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가 바로 그 현장이다. 솔직히 나는 크라쿠프를 관광한 후 아우슈비츠를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수용소.jpg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정문 앞에는 여느 관광지나 마찬가지로 관광객들로 시끄럽고 부산하다. 그러나 수용소 자체가 박물관인 그곳의 쓸쓸한 흙길을 밟는 순간,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모두들 입을 다물고 얼굴이 굳어진다. 아내는 이곳을 한마디로 끔찍하다고 말했다.


28개 동이나 되는 붉은 벽돌의 수용막사 중, 15동 막사는 유대인 음악가들이 수용됐던 곳이다. 막사에는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죄수복 차림의 수용자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사진이 있다. 우리는 유럽 어느 도시를 가나 존재하는 유수의 오케스트라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죄수.jpg 수용소 사람들 앞에서 작은 음악회를 하는 사진


그런데 화려한 유럽의 문명과 문화가 도달한 지점이 결국 여기였는가 하는 생각에 회의감이 든다.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독일을 대표하는 유명 기업인 지멘스, 크루프 등이 지었다. 독일의 거대 화학공업 카르텔인 이게 파르벤은 수용소에 살충제를 대량 납품했다.


프라하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폴란드의 쇼팽도 떠올리고 체코의 드보르작도 떠올렸다. 그러나 체코 곳곳의 수용소에 머물러 있던 유대인들이 이 철길을 따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향해 갔을 것을 떠올리면 유럽은 결코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치가 패하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크라쿠프서 유대인의 비극은 계속된다. 1945년 8월 11일 유대인들이 유대교회서 기독교 어린이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크라쿠프에서 퍼졌다. 오래된 반(反) 유대 유언비어의 새로운 버전이었다. 유대교회가 공격당하고, 유대인이 살해된다.


2차 대전 중 인종 학살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피로 물든 집단학살이다. 폴란드인들은 그들이 받은 고통을 훨씬 더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풀려고 했다. 지금 가자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과거의 고통을 잊은 양, 아랍인 약자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다.



호장실.jpg 수용소 막사의 공동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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