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자유여행을 떠났던 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러시아를 여행했다고 해봐야 가본 곳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상트’) 두 도시가 전부다. 그럼에도 처음 해보는 자유여행이라 어설픈 것 일색이었다.
여행 준비 과정서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숙소를 정하는 일일 게다. 호텔보다는 싼 민박집을 숙소로 정하기로 했다. 모스크바서는 한인이 하는 민박집을, 상트서는 조선족이 하는 민박집을 골랐다. 한인이건 조선족이건 여행 편의를 따져 선택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모스크바의 한인 사장은 더도 덜도 아닌 서울깍쟁이 같은 양반이었다. 여행하던 7월 초 러시아는 백야 시즌으로 관광 성수기였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온라인으로 기차표 예약이 안 됐다. 그래서 현지에 가서 기차표를 구해야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 한인 사장에게 상트로 가는 기차표 구하는 일을 물었더니, 이런 성수기에 예약도 안 하고 오는 사람도 있냐며 한심한 인간으로 치부했다. 그가 예매 대행을 맡아 커미션이라도 챙겼어야 하는데, 내가 그리 안 했으니 일층 더 비웃었던 것 같다.
비웃는 것까지는 좋은데, 몇 마디 조언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일절 없었다. 그 때문에 기차표 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그 사연을 따로 지면을 빌려 써야 할 정도다. 사장이 조금만 손을 써줬더라도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상트에 가서는 조선족 사장이 하는 민박집에 묵었다. 한인 사장에게 조선족 민박집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말하니까 뭔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장이 러시아 민박업계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는 식의 얘기를 했다. 그냥 업체끼리의 경쟁에서 비롯된 발언쯤으로 생각했다.
조선족 사장은 아닌 게 아니라 좀 투박한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손님들 일은 열심히 봐줬으나, 어찌 보면 장삿속도 꽤 밝은 이였다. 난 러시아서 핀란드로 가는 기차표를 비롯해 기타 다른 행선지의 기차표 구하는 것을 조선족 사장에게 부탁했다.
조선족 사장은 직접 자가용으로 나를 대동해 시내의 매표 사무소를 찾아가 기차표 구입을 도와주었다. 나 혼자 찾아가서 이 일을 했더라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족 사장은 아무런 커미션도 받지 않고 도와줬지만, 대신 그는 바늘로 황소를 낚았다.
조선족 사장은 알고 보니 모스크바서도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여행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원래는 먼젓번 묵은 그 한인 민박집을 또 이용코자 했다. 그러나 기차표도 구해줬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그냥 조선족 사장 집으로 숙소를 바꾸었다.
조선족 사장은 모스크바서 택시 사업도 소소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그 택시를 이용도 했으니 그이는 나만을 대상으로도 여러 장사를 한 셈이다. 조선족 사장은 중국 지린 성이 고향으로 처음에는 러시아와 중국을 왕래하며 보따리 장사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이때 쌓인 러시아어 실력이 그곳서 여러 사업을 벌이는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민박집도 꽤 잘 되는 편이었다. 아마 부인인 조선족 아줌마의 음식 솜씨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한인 민박집과 달리 늘 손님이 바글바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씩 한국서 온 손님들이 조선족 사장과 러시아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언쟁이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다. 이곳이 조선족 사장의 홈그라운드니 만치 손님들은 설사 사장 말에 화가 났다 치더라도 그냥 꾹 참는 눈치였다.
손님 중에 어떤 이가 러시아 스킨헤드족이 한국 교민을 폭행한 얘기를 꺼냈다. 사장은 그 말을 대충 무시하고 자기가 경험한 바로는, 그곳서 사업을 하면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처럼 그렇게 순수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들도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뭐 그 정도야 참아줄 만 한데 사장은, 러시아 사회보장제도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 이에 덧붙여 이미 그 시점에서도 장기 집권을 해오고 있던 푸틴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얘기를 해서 한국 손님들과 충돌을 많이 했다.
사장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서방 언론이 푸틴에 대해 왜곡 보도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 중에서 푸틴을 반대하는 이는 소수(8%)이고, 이들조차 자신들 정파적 이익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서방 언론은 바로 이 8%만을 상대로 인터뷰를 해 기사화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떤 손님이 그해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러시아의 페미니스트 록밴드가 푸틴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투옥된 사실을 말했다. 사장은 그 ‘페미’들은, 푸틴을 비난해서 투옥된 게 아니고 러시아 정교의 본산인 그 성당을 무단침입 해 투옥된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바티칸 성당이나 노트르담 성당 안에 들어가서 그런 짓을 하면 그냥 놔두겠냐고 흥분했다. 그는 얼마나 푸틴을 좋아하는지 관광 정보를 주면서도 굳이 안 해도 되는 푸틴 얘기를 꼭 꺼내서 했다. 한 번은 한국식당이 있는 건물을 가르쳐주면서였다.
사장은 그곳이 원래는 카지노 건물이었는데 푸틴이 싹 없애버렸다고 한다. 공산주의 소련이 붕괴하면서 급격한 사유화가 진행되자 과두재벌이나 마피아 그룹들이 러시아 내 주요 자산을 확보하면서 그 여파로 러시아에서 카지노 산업도 번성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푸틴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들과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들이 재산을 들고 해외로 튀어서는 러시아 바깥에서 틈만 나면 푸틴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조선족 사장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사장은 역시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나토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도발했을 가능성을 말했다. 교황은 러시아군의 잔악행위를 비판하면서도, 흑백논리를 넘어 우크라이나 사태의 뿌리와 이해관계 등 복잡한 문제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