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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종탑들과 라흐마니노프

by 양문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7년)에는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그곳 참새언덕에 올라 시내를 조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나폴레옹 기분을 내며 그 언덕에 올라 모스크바를 내려다봤으나 나폴레옹 전쟁 때와는 달라졌을 그 풍경이 별로 신통치는 않았다.


“무수한 교회를 품은 이 아시아적인 도시, 모스크바, 저들의 성스러운 모스크바! 마침내 여기에 있구나. … 저기 모스크바가 둥근 황금빛 지붕과 십자가를 햇빛에 반짝이고 아른거리며 나(나폴레옹)의 발아래 누워있다.”


이슬람 사원의 뾰족탑들이 터키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이루듯이,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시들에선 여기저기 동방정교 사원의 둥근 지붕과 십자가들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러시아정교가 과거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얼마나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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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펜키 사원의 뒷문.jpg 위부터 차례로, 모스크바 크렘린 궁안 이반 대제의 종류, 아르항겔스키 사원, 테트리스 궁전이란 별칭을 가진 바실리 사원, 우스펜키 사원의 뒷문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가 있다. 러시아 귀족 가문 태생인 그는 1917년 혁명으로 미국에 망명하고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다. 그의 음악에서 묻어나는 애수와 감상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높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그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1위로 자주 꼽혔다. 그의 피아노협주곡 2번은 ‘클래식 애창곡 1위’다. 그의 음악이 단순한 애수를 넘어 우울함과 구슬픔, 비관주의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너무 드라마틱해서 때론 통속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러시아에만 있었으면 지금만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망명 이후 유럽과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특히 미국 청중들에게 잘 먹히는 눈부신 기교의 곡들을 연주한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미국서 날로 발전했던 녹음 기술과 문화산업은 그의 음악을 전 세계로 울려 퍼져 나갈 수 있게 한다. 현대적인 청각적 공동체에 새롭게 편입한 세계의 청자들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가진 감정적 호소력에 쉽게 접근하고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구미 청중의 취향에 맞아떨어졌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의 음악의 원천은 그가 두고 온 고향 러시아였다. 그의 음악에는 러시아 여러 도시와 시골 교회에서 울려 퍼졌던 종소리와 정교회 성가를 연상케 한다고 한다.


그 종소리와 성가는 평안과 고요이며. 자신이 속했던 러시아의 자연을 향한 사랑, 그리고 고독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 나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그런 종소리와 성가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혹여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으로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대신 그런 종소리와 성가를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엄하고 화려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을 들을 때는 한 개의 종소리가 아닌 여러 종탑들에서 어울려 퍼지는 다수의 종소리를 듣는 상상에 빠진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C#단조는, 세계에서 가장 혹사(?)당하는 다섯 편의 피아노 곡 중 하나라고 한다. 그 기교가 대단한데 이로부터 빚어지는 심상찮은 음향들은 다양한 해석의 문구들을 끌어온다. 가령 그 소리가 ‘모스크바의 종소리’니, ‘죄와 벌’ 같다느니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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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 강안의 폴 서당.jpg 위부터 차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같은 카잔 성당, 피의 사원(그리스도 부활 성당), 네바강 연안의 폴 성당


세계 여러 나라, 심지어 한국의 라흐마니노프 팬들은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각자의 경험을 새겨 넣지만, 이들의 음악적 경험은, ‘옛 러시아’의 느낌을 매개로 하면서 이를 훌쩍 넘어 인간의 보편적 생각과 느낌에 이르게 된다.


모든 뛰어난 예술적 성취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구체적 삶과 전통의 세계를 매개로 한다.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들 중 하나인 백석과 김소월의 시는 모두 서북지방 향토의 세계와 방언을 기초로 한다.


심지어 모더니스트 정지용조차, 모더니즘이 강조하는 이미지를 한국적인 경험의 표현으로 녹여낸다. ‘남도 가락’이 없는 김영랑의 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러시아성은 망명을 거쳐 서구의 음악청중과 적극적으로 만나면서 화려하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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