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재직하던 시절 통상 대학생들은 3학년 때는 수학여행을, 4학년이 되면 졸업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학과 여행을 다녀왔었다. 단 우리 국문과 학생들은 이 수학여행을 ‘문학답사’ 여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갔다.
문학답사 여행의 일정은 대부분의 국문과가 비슷했다. 가령 우리는 문학답사 여행을, 조선시대 고전문학의 주요 산실인 남도 쪽으로 주로 갔다.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보길도를 첫날 가는데, 학교가 있는 강릉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아침 일찍 떠나도 저녁 다 돼 도착하곤 했다.
보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몇 군데를 더 두르는데 그중 하나가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김영랑 생가다. 강진군청 왼쪽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끝에 그의 생가가 있다. 들어가는 길가에는 영랑 슈퍼, 영랑 연립주택이라는 상호나 이름을 붙인 건물도 있어 이조차도 정겹게 느껴진다.
영랑 생가를 두른 돌담의 단풍 든 담쟁이도 이름답고, 생가에는 그의 시의 소재가 됐던 샘터, 장광(장독) 대, 감나무 등이 눈에 띄고 꽃이 필 때는 아니었으나 모란도 많이 심어져 있다. 생가 뒤로 놓인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강진읍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 시비가 하나 있었다. 영랑의 모든 시는 원래 제목이 없다. 그 시비의 시 역시 제목은 없고 ‘어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으로 시작되는 시다. 나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국어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 시비를 열심히 읽고 나더니만, 나에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그 시의 마지막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라는 구절 속의 그 ‘한 분’이 분명 여인인 듯싶은데, 도대체 그 여인이 누군지 아냐고 물어봤다. 김영랑에 대해 깊이 아는 바가 없는지라 대충 대답을 해줬다.
영랑은 15세가 되던 소년 시절, 혼인한 이듬해 두 살 연상의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춘기 나이에 그 충격이 컸을 것이고, 시 속의 ‘눈만 감으면 떠오른 얼굴’은 사별한 아내가 아닐까 싶지 않나 얘기해 줬다. 그 선생은 또 다른 여인은 없었냐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여인도 있었다. 첫 부인과 사별 후 영랑은 1925년 재혼하지만, 그 직전 조선 무용계의 전설적 여인인 최승희와 사귀었고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때의 추억을 ‘모란’에 빗대어 썼다는 것이다.
나는 영랑과 최승희의 로맨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단 작품서 작가의 의도나 생각을 살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은 작가인 경우 작가의 생각을 확인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작가가 자기 생각을 기록에 남겨 놓는다 하더라도 창작체험담 중에는 믿지 못할 것도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순수시를 지향코자 한 김영랑 시의 성향으로 볼 때,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을 어떤 특정한 여인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듯싶다. 영랑은 1935년 자신의 시집을 처음 상재할 때 아까도 말했듯이 작품 제목 없이 일련번호만 붙여 53편을 실었다.
추상화 또는 비구상 전시회를 가면 그림 제목을 안 달고 번호만 붙여 놓듯이 말이다. 영랑은 시의 내용보다는 정서적 울림을 중시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의미가 아니라 노래로만 들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시도 원래 제목은 없다)도 역시 그렇다.
영랑은 모란이 피는 순간의 찰나적 아름다움을 언어로 붙잡아 놓기 위해 언어를 갈고 다듬었을 뿐이다. 앞서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도 어찌 보면 시인이 이루지 못해 마음속 미련과 한으로 남아 있는 어떤 대상일 수도 있다. 그게 모란이라면 어쩌랴!
영랑은 강진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좀 과장을 보태 얘기한다면, 모란이 지고 나면 마냥 섭섭해 울면서 일 년 내내 상심에 젖어서 살던 이다. 좋은 (판) 소리 공연이 있으면 가끔씩 서울이나 오갔다고 한다. 어찌 보면 팔자 좋은 시인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영랑은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고향인 전남 강진으로 갔다. 그곳에서 같은 해 4월 4일 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전력 때문에 일제 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와 핍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끝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김영랑은 해방되고 난 후 한국전쟁 당시 9‧28 수복 직후 거리로 나갔다가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두견>이나 <독을 차고>에선 영랑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영랑 시의 리듬을 무척 사랑했는데, 당신의 정년퇴임식 때, 퇴임 기념 강연을 <두견> 전체를 외워 낭송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시에서는 시인의 사무친 한이 강하게 느껴진다.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루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적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서름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놓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