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비평론 강의를 하던 교수님이 얘기하길, 시인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비평가가 되고, 비평가가 되려다 못 된 사람이 문학선생이 된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는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대학 졸업 마지막까지도 소설가를 꿈꿨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고, 문학비평과 문학연구가 명확히 구분이 되는 건 아니나 어쨌든 문학평론가로 정식 데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30여 년 이상을 재직하다가 퇴임했으니 그게 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한때 나는 저명한 시인이자 평론가인 내 또래의 C선생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 그 선생 시는 중등학교 문학교과서에도 실렸다. 시도 시이지만 비평가로서의 문제의식도 날카로웠다. 시도 잘 쓰고 비평가로서의 솜씨도 뛰어나니 C선생은 문학선생으로선 손색이 없는 셈이다.
그런 C선생도 언젠가 나보고 “양 선생님처럼 강의를 재밌게 해 봤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C선생은 매사에 진지해 엉터리 학생들은 그 선생 수업을 좀 지루해했던 것 같다. 나는 외려 C선생에게 “선생님처럼 학생들에게 기억에 남는 강의를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대꾸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국어학 전공 선생님이, “두 분 다 욕심을 버리십시오!”라고 말해 모두 함께 웃었던 적이 있다. C선생은 나중에 창작에 전념하겠다며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으로 옮겨 갔지만, 논문을 부지런히 쓰는 와중에도 틈틈이 시집을 내서 전해주곤 했다.
시집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고맙기도 하면서 의무감으로 열심히 읽고 독후감을 전달했다. 언젠가는 그 선생의 시를 평하면서 선생님 시의 구도는 아주 잘 짜여 있는데, 단 그런 완벽한 구도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더 큰 감동을 막는 것 같다고 얘기해 줬다.
그 선생은 뭔가 알 듯 모를 듯싶은 웃음을 짓더니, “선생님! 제 시를 일단 애정을 갖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했다. 마치 내가 그의 시를 읽는 목적이 어떤 흠결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어 조금은 민망했었다.
시인들은, 시도 쓸 줄 모르는 나 같은 이들의 비평이 미덥지 않은 것 같다.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시에 대한 판단은 오직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도 모든 시인이 아니라 최상급의 시인만이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시인이 아닌 비평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얘기다.
18세기 영국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멍청이 시인 하나가 멍청이 산문가 열 명을 낳는다.”라고 말해, 못난 시인 하나를 놓고 열 명이나 되는 이른바 평론가들이 제각기 지껄여 대는 것을 꼬집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지껄일 때가 적지 않았다.
C선생의 시가 어쨌건 간에, 시인으로서 그의 삶의 태도는 그냥 문학선생이기만 했던 나와는 많이 달랐다. C선생의 삶의 태도는 내가 흉내 낸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천생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들게 할 때가 많다.
그는 일단 세상의 불의를 못 참고 괴로워하는 스타일이다. 이 때문에 위태위태한 일도 많았다.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얼렁뚱땅 타협하고 넘어가는데, 특히 그는 당시 광주를 짓밟고 집권한 군부세력에 대해선 늘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내가 진짜 그 이를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은 새와 꽃과 풀 등 자연에 대한 그의 박식한 관심과 섬세한 사랑이다. 어느 계절 경포호수를 같이 걸어갈 때였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무성한 갈숲에서 짝짓기 하는 개개비 울음소리를 나에게 조용히 일러줬다.
그의 시집과 많은 시들은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들꽃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공자가 이르길, 시는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했다. 공자 말씀이 다 맞는 게 아니더라도 이런 점에서 나는 시인으로서 대단히 부적격한 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길, 셸리는 ‘타고난 시인’이고, 워즈워스는 ‘만들어진 시인’인데. 진짜 시인은 ‘타고난 시인’이라 했다. 나는 만들어지지도 않고, 당연히 타고난 시인도 아니다. 그냥 평생을 즐거운(?) 문학선생으로 지낸 자인데, 그것만으로도 늘 하늘이 내린 복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