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시 「유리창Ⅰ」은 시인이 어린 아들을 잃고 난 후의 슬픈 심정을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다. 실제 정지용 스스로가 이러한 말을 한 적은 없다. 단지 그의 문우였던 박용철이 1935년 출간된 정지용 시집을 리뷰하면서 언급했던 내용이다.
자식의 죽음과 관련된 슬픔을 암시하는 정지용의 시는 「유리창Ⅰ」 말고도 몇 개 더 있다. 가령 그의 「비극」(1935)이라는 시에서는 “일찍이 나의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라는 시구가 나온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정지용 시 관련 숙제를 내줬다. 지용 시집 전체를 읽어보고 자신의 개인 체험과 관련돼 인상 깊은 시를 하나 선택해, 왜 그 시가 인상 깊었는지를 수필의 형식으로 써내라는 것이었다. 한 여학생이 정지용의 「발열」(1927)이라는 시를 골랐다.
그 시에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 오르노나”하는 구절이 나온다. 학생은 어린 시절 아파서 온몸이 열이 올랐을 때, 밤늦어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가 자신의 뜨거워진 이마에 서늘한 손을 얹혀줬던 일이 기억나서 그 시를 골랐다고 했다.
「발열」에서는 어린 자식이 가쁜 숨결을 내쉬며 "애자지게" 보채고,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에 속절없이 안타까워하는 아비의 심정이 그려진다. 학생이 이를 잘 이해한 것 같다. 지용이 가톨릭에 귀의하고 종교시편을 적잖이 쓴 것도 자식을 여읜 슬픔과 관련됐을 수도 있다.
앞서 얘기한 박용철은 「유리창Ⅰ」을 높이 평가하면서, 유리창에 나타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도 슬픈 성에의 형상은, 세상을 떠난 어린 자식의 영혼이 가있을 곳을 얻지 못해 공중을 떠돌다가 그 모양을 얻어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풀이했다.
좌익 문인 임화는 정지용 시 자체가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박용철의 해석이 고까웠는지 이에 대해 비난과 분노의 언사를 퍼붓는다. 임화는 뭣보다도 현재 조선에 우리들을 울리고 괴롭히고 때리고 노하게 하는 현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미사’의 촛불을 밝히고 천국을 빌며 하나의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만 사람의 동포의 죽음과 불행보다도 아프게 호소하는 영혼과 감성에 대해 금할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고 했다. 물론 임화는 자신이 정지용의 「향수」와 같은 슬픈 노래를 버리는 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슬픔에 빠져서 진정한 슬픔을 보복의 뜨거운 불길로 고치지 못하는 시인은 어떻게 보면 조선 사람들에게 패배감을 권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임화의 비판은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좀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유리창을 시인의 아들의 죽음과 연관시켜 설명하지 않고, 시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한 글도 있다. 「유리창Ⅰ」과 함께 「유리창Ⅱ」에서는 시적 자아가 유리창 안으로 단절돼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 유리창의 황홀할 정도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러한 형상은, 시적 자아가 지극히 폐쇄적인 시대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최소한의 자기를 지키려는 안간힘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지용은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라고 말했다. 지용의 아름다운 언어 자체가 암울한 시대에 대한 하나의 미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괴팍한 시를 많이 썼던 아방가르드 이상조차 자신의 ‘애송시’로 정지용의 유리창을 꼽았다.
좌익평론가 김동석은 지용의 시를 “송사리 한 마리 없게 너무도 맑다.”라고 했다. 시가 너무 맑다는 것은 지나치게 순수성을 지향하다 보니 삶의 풍부한 가능성을 놓쳤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동석 스스로도 “시를 위한 시” 순수시!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