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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n 23. 2024

중부 유럽의 ‘홍수’와 슈베르트

2014년 체코에서 안식년을 보내고자 그 전년부터 프라하 카렐대학교 쪽과 분주히 메일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2013년 6월 초 한참 소식이 끊겼다. 중부유럽 일대에 큰 홍수가 나서 프라하 시내가 물에 잠겨 교직원들이 출근을 못해 어떤 업무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 중부유럽 지역은 우리처럼 장마철이 있어 주기적으로 홍수 피해를 입는 지역은 아니다. 2019년 비슷한 시기 헝가리 부다페스트 두나 강에서 한국인을 태운 유람선이 크루주와 충돌하면서 침몰한 사건이 있었다. 


프라하 페트린 공원서 내려다본 블타바 강(위) 체스키크룸로프 성에서 내려다본 블타바 강


이 사고는 홍수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지만, 당시 두나 강은 폭우로 평소보다 강물이 많이 불어나 구조작업을 하는데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중부유럽은 홍수가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은 아니다. 


대개 이 지역은 5월 말과 6월 초에 걸쳐 남쪽의 산맥들 알프스, 카르파티아 산맥 등등에서 눈이 녹아내리면서 그곳의 강물이 불어난다. 불어나는 수치야 해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강물이 불어난 때를 맞춰 공교롭게도 폭우가 내리면 흔치 않은 수해를 당하기도 한단다.


헝가리 부다 성에서 내려다본 부다페스트의 두나강(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내려다본 비엔나로 가는 다뉴브 강(가운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성에서 내려다본 잘차르 강


이런 얘기들은 다 독일 유학 갔다 온 교수로부터 주워들은 얘기들이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에 나오는 <홍수>라는 제목의 노래를 떠올렸다. 이 노래에 나오는 ‘홍수’를 우리 장마 때의 홍수로 생각하면 안 된다. 


<겨울 나그네>는 실연당한 한 남자가 겨울 방랑의 길을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게 중학생 때다. 이 중 <보리수>는 널리 알려진 곡이다. 그 밖의 다른 곡들은 당시 처음 들었는데 그중 내 맘을 사로잡았던 곡이 첫 곡인 <밤 인사>와 6번 곡인 <홍수>다. 


가사와 내용도 몰랐지만  <홍수>는 멜로디 자체가 비장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 아름다울 정도로 서글펐다. 고등학교 가서 독일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그 뜻도 알게 되고 독일어가 가져다주는 리드(Lied)의 맛이 무엇인지도 아주 조금은 알게 됐다.     


슬픔에 젖어 길을 떠난 겨울 나그네는 얼어붙은 냇물에 다다른다. 나그네는 냇물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쌓인 눈 위로 떨어져 얼음이 된 눈물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얼어붙은 내 눈물이 봄이 돼 녹고, 눈녹이물이 냇물을 따라 강을 따라 흘러가면 그녀의 집 앞까지 가겠지.” 


이를테면 오월 또는 유월 프라하, 비인, 부다페스트의 강에는, 지난겨울 얼어붙었던 한 남자의 눈물이 홍수가 돼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겨울나그네>의 <홍수>는 비장한데, 첫 곡인 <밤 인사>는 고독하다. <밤 인사>는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난다네.”로 시작한다. 


1824년 3월 27일 자 슈베르트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낄 수도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오, 이것을 깨달은 자는 얼마나 비참한가!”


이 일기를 읽고 나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 어느 한 곡을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들어보면 그가 참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가 위로받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음악에서라는 것도 느끼게 된다. 왜 그는 그리 외롭고 쓸쓸했을까? 


땅딸막한 몸과 못 생긴 얼굴이 그를 낙담케 했을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유가 좀 유치해 보인다. 그럼 나는 수도 없이 낙담했을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라서? 슈베르트가 재정적으로 부침은 심했지만 당시 그가 결코 성공하지 못한 무명의 음악가는 아니었다. 


단 19세기 음악가는 앞 시대와 달리 특별한 후원자도 없고 교회나 궁정자리 등 다른 어떤 음악 관련 직책을 갖지 못했다. 오로지 시장을 통해 생계를 꾸리며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가야 했는데 이것이 슈베르트라는 한 예술가의 실존에 영향을 미쳤을 법도 하다.  


나는 한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슈베르트의 바로 앞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폭풍이 몰아쳤던 시대다. 슈베르트가 가장 존경했던 베토벤(그래서 슈베르트는 몸소 그의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은 그 폭풍의 시대를 열정과 감격 속에 살아갔던 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유럽 특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부유럽은 전통군주제가 다시 강화되고 보수반동세력이 사회 전반을 억누른다. ‘유럽의 경찰’로 악명 높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스파이망과 치안망을 확립하고 예술가, 대학생들을 집요하게 탄압한다.   


슈베르트도 오페라를 둘러싸고 검열관과 심한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쓸쓸함과 비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단정할 순 없고 슈베르트와 그가 살아간 시대 모두를 생각하면서 한 인간, 한 예술가의 내면에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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