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문규 Jun 30. 2024

김상용은 진짜 “남으로 창을 내고…” 살고 싶었을까?

고등학교 교과서에 1930년대 대표적 전원풍의 시로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1932)와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1934)가 실려 있다. 신석정 시는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 위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로 시작된다. 


그의 시는 삶이 힘들고 팍팍할 때 언제고 읽어도 큰 위로와 안식을 가져다준다. 김상용 시 역시 독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행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시구는, 꼭 이백의 시를 흉내 내서만은 아니고, 신석정 시만큼의 깊은 정서적 울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김상용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쓰기 1년 전쯤, 「무제 - 만보산 참살 동포 조위가 연습하는 것을 듣고」(1933)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프로문학 쪽 비평가 임화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김상용은 일본에 유학, 릿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후일 시인 윤동주도 이 학교 영문과를 잠깐 다닌 적이 있다.) 1928년 귀국해서 이화 여전 교수로 근무한다. 위의 시는 그 시절에 쓴 시다. 시 말미에 “1932년 1월 교내 사회실(社會室)에서”라는 부기도 있다. 


시의 배경은 중국 만주에서 일어났던 만보산 사태다. 당시 이화 여전 학생들이 이 사건으로 참화를 입은 우리 동포들을 애도하는 ‘조위가(弔慰歌)’를 교내에서 연습하고 있었나 보다. 제자들의 이 노래를 듣고 선생이었던 시인 자신의 솟아오르는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젊은 여학생들이라면 의당 즐겁고 기쁜 5월의 노래를 불러야 할 때이다.  그럼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조위가를 연습해야 하는 이 땅의 누이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들의 눈물과 노래가 이천만 동포와 강토를 울리니, 이러한 슬픈 시국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만보산 사태란? 1931년,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관개수로 문제로 한‧중 농민 간 갈등이 발생한다. 일본은 중국 쪽의 불만을 무시하고, 우리 농민을 부추겨 양쪽의 충돌이 일어나지만 실제로 조선인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사건을 확대하고 국내 언론도 우리 동포가 참살됐다는 ‘가짜뉴스’를 전하면서 반중(反中) 감정이 일어나 인천, 서울 등지서 화교 테러사태가 벌어진다. 평양을 비롯해 곳곳에서 중국인의 유혈이 낭자할 정도였다.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폭력으로 변한 것이다! 


덕분에 일제는 조선인의 항일의식을 반중 감정으로 돌려 양 민족을 이간하고, 그 틈을 타 그해 가을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김상용 시는 결국 유언비어를 따른 거고, 이화 여전 학생들의 조위가 연습도 실체를 모르는 어찌 보면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일이었던 셈이다.


김상용은 만보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반(反) 중국 선동에 이용당해 대중을 유치한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이끈 셈이다. 김상용은 이런 시를 쓰고 나서 찝찝했던지, 곧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는 마치 현실에 달관한 듯한 ‘귀거래’의 포즈를 취한다.  


김상용이 귀거래를 통해 계속 이러한 시세계를 발전시켜나갔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이 양반이 궁극적으로 그런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태평양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조선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를 쓴다. 


그것이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1943)라는 시다. 시 첫머리에 “젊은이들아 너와 나의 큰 광명”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과거 아시아와 태평양의 10억 동포는 사슬에 묶여 살았다. 이제 조선은 일본과 함께 선진일원이 돼 이 사슬을 끊고 낙토건설을 해나가야 한다고 노래한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몸을 태워 어두운 방의 불을 밝혀야 한다. “소아(小我)를 멸해, 대아(大我)의 거듭남이 있다./충(忠)에 죽고 의(義)에 살은 열사(烈士)의 희원(希願),/피로 네 이름 저 창공에 새겨/그 꽃다움 천천 만대에 전하여라.”   


이 시를 읽으면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참 허황되게 들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원파 시인 신석정은 일제 말 전라도 부안 시골에 파묻혀 살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당시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올곧은 처신을 한다. 


신석정은 「화석이 되고 싶어」(1934)라는 시에서,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다”라고 노래한다. 그의 시는 단순한 전원시를 넘어 어떤 기개조차 엿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의 세상이 불의의 세월을 이겼던 것이다! 

 

 

『매일신보』(1943.8.4.)에 실린 김상용의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