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대표 시인들 중에는 김억(안서), 주요한 말고 최승구(최소월)라는 시인도 있다. 최승구는 이 시기 어느 누구보다도 주목을 받았던 시인이지만, 191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서 더 이상의 문학적 성과를 남기지는 못한다.
최승구는 동경유학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과의 열정적 연애로도 유명하다. 그가 1910년대에 쓴 여러 글들은, 그것이 시대의 한계 속에 놓여 있긴 하지만 이 시기의 여느 작가들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한 니체 전공자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 현대철학자 니체를 소개한 사람이 최승구라고 한다. 최승구 역시 니체를 자아의 실현이라는 개인주의 사상을 주장한 자로 보고 있지만, 그는 니체의 개인주의 사상이 사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래서 최승구는 조선의 청년들은 니체를 배우되, 사회현실 가치를 부인하고 공공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빈궁에 처한 조선 농민들을 제대로 된 생활의 토대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동경유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을 한 이는 드물다.
최승구의 절친한 친구로 나경석이 있다. 나경석은 최승구의 연인이었던 나혜석의 오빠다. 나경석 역시 당시 일본 유학 중이었는데, 그는 곤궁한 상황에 처한 재일교포들을 돕고자 부잣집 아들이었음에도 오사카 빈민굴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회운동에 투신하고 있었다.
최승구는 그의 대표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벨지엄의 용사」(1915)라는 흥미로운 시를 발표한다. ‘벨지엄’은 ‘벨기에’를 가리킨다. 이 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했던 독일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벨기에 용사의 죽음을 기리는 시다.
1차 대전은 조선에서는 머나먼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유럽 전체를 뒤덮은 이 전란의 엄청난 재앙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도 자세하게 알려진다. 1차 대전에서 죽은 군인의 수는 9백만이고 일반인 부상자 수는 2천만이나 된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나 그 밖에 일본신문을 읽고 이러한 전장의 참상을 알게 된다. 당시 이 전쟁을 알리는 신문의 보도방식이 사진 등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조선인 독자들에게 막연히 인식 돼왔던 ‘전쟁’과 ‘유럽’이라는 존재가 훨씬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약소민족인 우리 처지에서는, 중립국 벨기에가 강대국인 독일에게 침공당한 사건에서 어쩌면 동병상련을 가졌으리라. 그래서 국내에서는 벨기에 망명정부를 위한 모금운동 따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최승구도 「벨지엄의 용사」라는 시를 쓴다.
벨기에는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약자로 시달렸지만, 실상 19세기 후반 유럽 바깥에서는 자신의 국토의 80배에 달하는 아프리카 콩고를 해외 식민지로 얻어내고 그곳에서 잔혹한 수탈을 벌인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었다.
최승구 같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벨기에의 제국주의적 면모까지 헤아려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해, 동맹국 쪽인 독일을 적으로 해서 싸웠다. 일본이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을 향해 적개심을 키웠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실제 일본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영일동맹의 의무를 다한다는 구실아래 약삭빠르게 참전하여, 태평양의 독일령 미크로네시아를 장악하고 중국 산동성 안에 있는 독일군을 분쇄해 그 조차지인 칭다오를 점령한다.
1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인사들 중 일부는,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일본의 적국이었던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려고 시도한다. 이미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1차 대전은 서서히 종결 국면으로 접어든다. 최승구가 1916년 죽었으니 그가 살아생전 볼셰비키 혁명을 목격했다면 1차 대전 이후 벌어질 사태에 대해 좀 더 입체적인 사고를 했으리라는 하나마나 한 가정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