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작가들을 배출했다. 『오만과 편견』(1813)의 제인 오스틴, 『제인 에어』(1847)의 샬럿 브론테 등이 그 대표적 예다. 이들 작품은 여성 작가들 고유의 칙릿(chick lit) 장르, 즉 ‘아가씨 문학’의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의 여주인공들에서 보이는 나름의 진보적 성격은 다소 놀라운 느낌을 준다. 특히 조지 엘리엇 같은 여성작가가 그렇다. 그녀의 『미들마치』(1871)의 여주인공 도로시아는, 스물일곱 살 연상인 학자 남편과 결혼해 그에게 헌신하는 전통적 부덕의 여인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겉모습일 뿐이다. 도로시아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산으로 “바라지도 않던 돈”이 들어오게 되자 늘 마음이 편치 못해 한다. “살아가면서 서로가 괴로움을 덜어주지 않는다면 우리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라고 반문한다.
도로시아는 당시 산업화로 가는 영국사회에서 궁색한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농민을 동정해 그들 삶의 개선을 위한 농지개량과 집단 농가를 구상한다. 남성들은 도로시아의 이런 실천과 이상주의를 비웃는다. 이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용감한 일이라면 무엇이건 찬미합니다만, 가장 가까운 이웃을 위해서 하는 용감한 행위는 칭찬하지 않는군요!”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도로시아라는 여성의 과장되지 않은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진보의 진정한 추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여행할 때다. 비도 자주 오고 흐린 날씨, 고풍스러운 건물들의 풍광은, 근대영국을 이끌어간 영국 남성들의 이성적이고 근엄한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시내에 서있던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또는 철학자 흄의 동상들이 그러한 인상에 일조를 했다.
그런데 올드타운에는 그런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몬스터’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의 이름을 빌린 술집 ‘프랑켄슈타인 펍’도 있었다. 그런 술집의 이름은 어디도 있을 수 있지만 하필!? 이 소설의 작가 메리 셸리 역시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이다.
메리 셸리는 에든버러 태생은 아니다. 태어나서 열흘 만에 엄마를 잃은 그녀는, 소녀시절 계모와의 잦은 불화로 가족과 떨어져 에든버러 인근에 잠깐 살았던 적은 있다. 메리는 이곳 스코틀랜드에 와서 살면서 런던과는 전혀 다른 야생의 자연을 인상 깊게 체험한다.
아마도 그러한 체험이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구상하면서 무대 중 한 곳을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정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은 앞의 영국 여성작가들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지금 식으로 말하면 소위 SF 소설이다.
그 시절에 공상과학소설이라니! 그것도 여성작가의 손으로! 메리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앞서 말했듯이 메리를 낳자마자 죽는다. 메리의 어머니는 메리를 낳기 전 이미 사생아 딸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관점에서 봐도 상상을 초월한 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당대 인습에 굴복해 혼인신고를 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결혼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여성 운동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파리로 직접 가기도 하는데, 골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쓴다.
그녀의 글을 읽은 영국 남성들은 그녀를, 영국국왕을 폐위시키고 가족을 해체하고 영국을 망치려는 ‘창녀’ 같고 미친 여자로 비난한다. 메리 셸리는 그녀의 어머니 같이 대놓고 페미니스트는 아니나, 천재이자 괴짜 낭만주의 시인 셸리와의 결혼 스캔들로 많은 물의를 일으킨다.
셸리는 무정부주의자 성향에 가까운 시인이었는데, 메리 역시 자본주의 문명‧제도에 회의적이었다. 이런 점들이 결국은 『프랑켄슈타인』에서 현대과학의 비극적 산물로 생각될 수도 있는 괴물을 창조하게 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에든버러의 올드타운에서, 프랑켄슈타인 펍 말고도 인근의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을 둘렀다. 그곳에는 우리에게 ‘비숍여사’로 알려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과 유물이 비치돼 있었다. 그녀는 1860년에 에든버러로 이주해 와 살았고 그곳서 본격적인 문필작업을 한다.
그녀가 한국여행을 하고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은 출간 당시 영국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녀는 1894년 예순 넘은 나이로 조선반도에 첫발을 들여놓았는데, 이후 1897년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이 시기의 여행기란 전통적으로 남성의 장르였고, 19세기는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정복과 탐험의 세기였다. 비숍은 정복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여성의 몸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시인 김수영은 그의 시 「거대한 뿌리」(1964)에서 ‘비숍 여사’를 언급한다.
김수영은, 서구 남성의 시각이 아니고 여성의 눈으로 우리 풍속을 큰 편견 없이 얘기한 비숍여사를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느꼈던 것도 같다. 김수영은 그녀의 기행문을 읽고 우리의 것이 더럽든 진창이든, 진심으로 우리의 전통을 사랑하게 됐다고 노래한다.
영국에서 여성의 선거권이 전면 보장된 것은 20세기도 훨씬 넘어서다. 그럼에도 19세기 영국 여성작가들의 생각과 행동들은 놀랍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그렇게 신속하고 원만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