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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Aug 04. 2024

잠깐을 살아도 살아야 하는 타국살이!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1786)을 읽으면, 그가 독일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러 갈 때 다른 왕국이나 제후국들로부터 가끔 첩자로 몰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자기 나라의 고위 관리나 권세 있는 귀족이 써준 편지 등을 내밀어 위기를 벗어나는 일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그런 편지가 일종의 여권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여권이 등장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전후라 한다. 여권은, 원래 전시에 스파이를 방지하는 등의 감시 인프라였는데, 1차 대전 이후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제국들이 해체되고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족출 하며 전면화된다. 


한국은 과거와는 달리 ‘여권 강국’으로 불린다. 즉 우리 여권으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외국에 가서 일정 기간 이상을 살려면 어느 나라든 해당 국가가 발급하는 장기비자가 필요하다. 


나는 안식년 시절 미국과 체코에서 각각 1년을 살았다. 당연히 장기비자가 필요했다. 미국서는 미국 대학의 초청장이 곧바로 비자 발급으로 이어졌지만, 체코는 그렇지 않았다. 주한 체코 대사관은 일단 대학의 초청장은 무시하고 체코당국의 노동허가서 따위를 요구해 왔다. 


대학과 대사관 측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 체코 외교부의 개입으로 간신히 비자를 받았다. 그러나 대사관 쪽은 끝내 몽니를 부려 내가 1년을 체류해야 함에도, 아내에게는 7개월, 나에게는 8개월짜리 비자를 발급해 체코에서 비자연장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했다.


비자연장은 일단 비자가 만료가 되기 한 달 전부터 신청을 해야 하고, 또 비자가 금방 나오는 것도 아니라, 체코에 있는 내내 비자 문제로 끌탕을 쳐야 했다. 애초 그곳의 공증인에게 위임해서 했으면 조금 더 쉽게 될 일을, 내가 직접 해본다고 나섰다가 더 낭패를 봤다. 


그쪽 외교부를 출입하는 건 큰일이 아니지만, 프라하 외곽의 외국인 경찰서를 드나드는 일은 싫었다. 그곳엔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쪽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로 붐볐다. 베트남 사람들도 많았다. 옛날 공산체코 시절에 북한, 몽고, 북베트남 등서 노동연수생들이 많이 왔었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 북한 사람들은 모두 본국으로 소환됐으나, 베트남 사람들은 잔류했고 그들의 이세, 삼세가 체코에서 산다. 이들은 체코어가 모국어라서 비자 문제로 이곳을 오면 유창한 체코어를 구사한다. 이들은 체코 사회 내에서 아주 잘 나가는 동양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체코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조차도 더듬대면서 서류 절차를 밟자면 ‘대한국인’(?)으로서의 스타일도 구기고 불법 체류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싫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체코서 해야 할 일을 못 했던 건 아니나, 이 때문에 늘 좌불안석이었다. 


요즘 ‘이웃집 찰스’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 우리나라에 더 머물고 싶고, 일도 하고 싶지만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내 경우가 그런 절박했던 것은 아니지만 외국서 잠깐 살던 시절이 생각나서 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자기 차도 없고 대중교통도 뜸하니 주말이면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일요일 슈퍼마켓에는 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인근 전지 공장에서 큰 화재가 나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희생됐다. 


내가 외국에서 잠시라도 살아보니 우리나라에 사는 어려운 처지의 외국인들이 좀 더 시야로 들어오게 된다. 또 먼 옛날 우리 조국을 떠나 먼 타지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의 처지를 바꿔 생각하게도 된다.  


외국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에선, 낮은 수준의 숙련도를 가진 자국노동자들은 이들 때문에 자신은 언제든 갈아 껴질 수 있는 톱니바퀴라 생각하고, 외국인들이 사회적‧경제적 혼란을 가져온다고도 생각한다. 원래 낯선 사람이나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혈통이나 피부색, 출생지 등에 집착하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시대는 가고 있다. “집에서 벗어났다고 집 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이주를 전제로 한 적극적인 ‘관리’를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 역시 고국에서, 또는 한국이라는 단일 문화권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가끔 내가 그런 범주에 함몰되고 있지 않나 물을 수 있는 것은, 잠깐이나마 비주류의 위치에서 경험한 불편한 타국살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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