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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만난 두 명의 한국학자, ‘교수’와 ‘사서’

by 양문규

체코로 안식년을 간 시기가 2015년이니 10년 전 일이다. 당시 카렐(찰스) 대학교 재직하던 한국학과 교수들은,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쳤던 체코의 일 세대 한국학 학자들은 이미 은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 은퇴한 일 세대 한국학자들 중 두 사람을 만나봤는데, 이들도 현재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한 이는 1933년생인 블라디미르 푸체크 교수다. 카렐대학교의 한국학과가 1950년 설립되는데, 푸체크는 1952년 입학했다. 재학 중인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북한을 다녀온다.


북한 청진에 설립된 체코슬로바키아 적십자 병원의 통역요원으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북한 체류 기간 중 일제강점기 활동한 프롤레타리아 작가 최서해의 아들을 만나 최서해 관련 자료들을 얻고 체코로 돌아와 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후 북한을 재방문해 외교관 신분으로 근무하다가, 1966년 북한에서 완전히 귀국한 후 카렐대학교 한국학과의 교수가 된다. 1989년 체코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한국과 체코가 수교한 이후 푸체크는 한국 외국어대 교환교수로 남한을 방문하기도 한다.


언젠가 그의 프라하 자택을 방문하니 화장실에 ‘제주관광’이라고 적힌 타월이 걸려 있어 함께 웃었던 기억도 있다. 푸체크 교수는 체코에 한국의 언어, 문학을 소개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문학 연구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줬던 건 아니다.


김일성 방문 시 푸첵.png
KakaoTalk_20150513_235540305.jpg 1984년 김일성의 체코 방문 시 기차에 합석한 푸체크 교수, 왼쪽 위서 두 번째 사람(위), 생존 시 자택에서 푸체크 교수


또 한 사람인 즈덴카 크뢰슬로바 선생은 푸체크 교수보다 2살 아래인 1935년생으로, 푸체크와 함께 비슷한 시기 한국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졸업 후 프라하 동양학 연구소 사서로 일하며 연구 활동을 이어간다. 2015년 만날 당시에도 여든의 나이에 논문을 계속 발표했다.


그녀는 1960년대 초반 평양 김일성대학의 교환학생으로 잠시 북한에 체류한 적이 있고, 남한에도 학술회의 참석 차 몇 차례 방문했다. 현재 카렐대학교에 재직하는 젊은 교수들은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학위도 한국에서 받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


그러나 일 세대 한국학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어에 서투르다. 그럼에도 크뢰슬로바 선생의 경우 한국어 논문, 문헌들을 읽는 데는 거의 지장을 받지 않는 듯싶다. 이는 그녀의 논문들에서 인용된 우리 책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학과 관련된 그녀의 주목할 만한 논문으론, 1920년대 한국 최초의 극작가이자 평론가인 김우진이, ‘로봇’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를 어떤 식으로 수용하는지를 비교문학적 방법으로 밝힌 것이 있다.


또 식민지시기 발표된 한국소설 중 서양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작품으로 김남천의 『대하』(1939)가 있다.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영어가 아닌 체코어로 번역됐다. 크뢰슬로바 선생은 한국과는 인연이 먼 듯싶은 체코에서 어떻게 이런 번역 과정이 이뤄지게 됐는지를 밝힌다.


문학연구만 아니라 그녀의 역사연구 역시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가령 일제 치하 만주와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전개된 한국의 독립운동이 한국과는 전혀 인연이 닿을 법하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어떠한 역사적 인연을 맺는지를 추적한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의 흥미진진한 내용은 국내 언론에 두루 소개됐다. 단 이러한 내용을 당시 한국에 주재하던 체코 대사가 한국에 소개할 때 연구출처를 정확히 밝히지 않아, 정작 그 분야의 전문연구자인 크뢰슬로바 선생의 존재는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체코 있을 당시 크뢰슬로바가 발표한 논문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그의 일본인 부인 이방자가 일본왕실을 대표해 1927년 체코를 방문한 행적을 밝힌 것이다. 1920년대 당시 체코 언론과 대통령궁의 미발굴 자료들을 통해 이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KakaoTalk_20150404_152611213.jpg 1988년 평양 한국학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50대의 크뢰슬로바 선생(좌측에서 두 번째)과 푸체크 교수(위), 생존 시 자택에서 크뢰슬로바 선생


체코의 일 세대 한국학자 두 명 중 푸첵은 교수, 크뢰슬로바는 사서의 신분이었다. 통상 우리가 아는 바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를 주도적으로 도맡아 하는 사람은 대학의 교수다. 그런데 체코의 크뢰슬로바 선생은 교수 신분은 아니고 도서관 사서이자 한국학 연구자였다.


나는 교수 신분으로 퇴임했지만 크뢰슬로바 선생을 통해 몇 가지 가르침을 얻는다. 뭣보다도 사서로서 크뢰슬로바 선생은 일단 학문의 출발이자 기초라 할 수 있는 자료를 조사하고 서지를 정리하는 실증 작업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이다.


이러한 실증작업 속에서 평생을 자발적으로 즐겁게 연구를 해나갔다. 먼 옛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엔 최고의 학자들이 사서로 일했다고 한다. 크뢰슬로바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아는 만큼의 지식을 전달하는데 만족했던 '선생'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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