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후기인상파 루소의 화풍은 독특해서 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의 다른 그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세관원 출신으로 스스로 그림을 배운 아마추어 화가인 루소는 파리 식물원의 화초를 보며 인도나 아프리카 야생생태계의 모습을 상상해 작품을 그렸다.
직접 남태평양 섬에 가서 살아본 고갱과 달리, 루소의 열대 풍경화는 그의 순전한 상상력에 근거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을 방문해서 본 루소의 그림 중, 거기엔 그의 대표작 「꿈」도 있지만, 「잠자는 집시」(1897)라는 그림이 좀 더 이국적(에그조틱)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다.
우선 이 그림의 배경은 루소 그림서 흔히 나오는 열대가 배경이 아니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집시 여인이라고 했지만, 실제 유럽을 떠도는 집시는 아닌 것 같다. 로브 형태의 줄무늬 가운을 걸쳐 입고 흑색 피부에 가까운 이 여인은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인 같다.
여인 주위의 지팡이, 토기, 비파 등의 소도구가 더욱 그리 보이게 한다. 달밤의 사막을 무대로 누워있는 여인 곁으론 사자가 어슬렁거려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루소의 「잠자는 집시」를 보면 당대 프랑스 소설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이국적 정서(엑조티시즘)를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었고 이 식민지들이 소설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여 엑조티시즘의 미적 효과를 불러온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들도 부분적으로 이와 관련돼 있다. 물론 그의 대표작 『좁은 문』(1909)은 그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은 외사촌 누이 엘리사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한다. 왜 그들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었는지가 이 작품에서 그다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게 이 작품의 매력일 수도 있는데 굳이 그 이유를 끄집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일 수도 있다.
엘리사의 어머니는 프랑스 식민지인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 출신이다. 그녀가 백인인지 혼혈인지 그에 대한 기술은 없다. 단지 그곳 출신으로 야성적인 고혹미를 지닌 그녀는 프랑스 부르주아 문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결국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출분 한다.
엘리사는 외모 상으로는 어머니를 닮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출분으로 아버지에 대해 평생 연민을 갖고 살며 스스로 결벽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수녀와도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 그것이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그와의 결합을 끝내 거부하는 한 이유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좁은 문』에서 엘리사의 막연한 신비로움은 그녀의 어머니가 식민지 마르티니크 출신의 이국적 여인이라는 설정에 힘입은 바도 있는 셈이다. 지드의 작품에서 엑조티시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은 『배덕자』(1902)이다.
『배덕자』의 주인공은 동성애 성향을 가졌던 지드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주인공은 고고학과 언어학 연구에 비상한 정열을 쏟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 계기가 프랑스의 식민지인 튀니스를 여행하면 서다. 그는 그곳에서 “갈색 얼굴을 한 아랍 소년들”에게서 살아있는 감각을 발견한다. “자신의 잊어버렸던 수많은 감각이 되살아나고 새로운 감각 능력을 의식한다.” 야자수 아래 천막서 그들과의 혼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나온다.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의 아랍지역은 유럽에서 갖기 힘든 성적 체험을 탐구하는 신비한 장소로서, 그리하여 더욱 방탕하나 죄의식에 젖지 않는 여러 가지의 성관계를 상상해 보는 장소다. 「잠자는 집시」의 드러누운 여인의 몽환적 분위기도 이를 환기한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 예술에서 아프리카 동양 등의 식민지는 살아있는 주체로 그려지지 않고 서구의 이국적인 타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유럽인들에게, 그 식민지는 야만이자 미개이지만 새로운 체험 특히 성적 체험을 경험할 수도 있는 이국적인 상상의 공간이다.
이효석은 우리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엑조티시즘’의 작가로 얘기된다.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이효석은 당연히 ‘식민주의자’가 아니고 ‘식민지인’이다. 그러나 대신 그는 강원도 향토를 자기 안의 식민지로 만들어 이를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성의 세계로 창조해 낸다.
이효석문학 속 자연과 향토는 루소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에그조틱하고 원시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향토는 실제라기보다는 지식인 작가인 이효석 상상 속의 세계일 뿐이다. 이는 김유정 소설 속 강원도 산골과 사람들이 살아있는 주체로 그려진 점과 대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