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서 안식년을 지낼 때 나는 유럽 현지에서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 그리고 건축물들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늘 가슴 벅차해 했다. 아내도 내 눈치를 봐가며 그러는 척했지만, 그녀가 진짜 사랑한 유럽은 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건 다소 시시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서였다.
가령 유럽의 식당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소읍의 평범한 식당을 찾았을 때, 테이블 위에 놓인 소박한 자수의 식탁보에 감동(?)했다. 식당에 초대를 받아 갔다는 기분이어서 그랬을까? 언젠가 우리 부부는 프라하 주재 한국대사관서 하는 송년회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대사관 측에서는 그쪽 케이터링 업체에 의뢰해 간단한 뷔페 음식을 준비했다. 예상했던 대로 음식은 별 볼 일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케이터링 업체에서 딸려온 은빛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중장년 웨이터들의 서빙에 또 한 번 설레했다.
프라하의 겨울은 매섭다. 웨이터는 아내가 입고 온 겨울 코트를 벗는 것을 정중히 돕고 잠시 후 다가와서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을 권했다. 플란넬 정장에 보타이를 맨 중후한 유럽 아저씨로부터 한 여인으로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한편 나는 앞서 유럽의 위대한 예술가, 건축물 운운했지만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는 여행을 하면서 덤으로 유럽, 특히 동유럽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도 은근히 가슴이 설렜다. 문제는 아가씨들이 나를 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어느 곳을 여행해도 유럽의 남자들은 아내에게 상냥하게 얘기를 걸고 사진도 함께 찍자고 했다. 어느 박물관을 관람할 때였다. 당시 환갑을 앞두고 있던 나는 농담 삼아 경로우대권을 달라고 했는데 여권 확인도 안 하고 진짜 내줬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내도 자기도 경로우대권을 달라고 했다. 매표소 청년은 아내를 장난스럽게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학생증’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이러니 아내가 유럽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내가 진짜로 사랑한 유럽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프라하에 도착하고 그곳 한인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었다. 목사님 사모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줬다. 그분은 프라하에는 유명한 관광지도 많지만 콜베노바라는 중고시장도 있으니 꼭 가보라고 했다. 주말마다 노천에서 열리는 큰 벼룩시장이었다.
비록 노천시장이지만 출입구도 있어서 한국 돈으로 천 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아내는 어쩌다 한번 갈 줄 알았는데 거의 매주 그곳을 방문했다. 잡다한 물건이 태반이지만 더러는 ‘즈비벨무스터’라는 체코의 유명한 도자기도 있고 보헤미안 크리스털 등도 있었다.
그 유명한 ‘스와로브스키’가 바로 이 보헤미아 지방의 크리스털 원석으로 가공된 것이다. 아내는 시내의 앤티크 가게 또는 갤러리서 이런 물건들을 황홀하게 구경했기에 중고시장서 혹여 횡재를 할까 싶어 돌아다녔지만 여기서도 이것만큼은 고가라 엄두를 못 냈다.
서양 할머니들이 손수 자수를 놓은 커튼, 시트, 식탁보 등의 수예품들도 있었다. 무명의 보헤미안 화가들이 그린 그림도 많았다. 아내는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그림을 담아놓은 빈티지 풍의 오래된 액자틀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겨했다.
아내는 콜베노바 시장에서 엄청난 ‘밀당’의 흥정을 해가며 사 왔던 추억의 물건들을 지금도 꽤 대견해하고 사랑스러워한다. 브랜드 도자기는 아니지만, 거기서 사온 체코 아르누보 풍의 찻주전자로 차를 내리면서 그 시절 그리움을 새록새록 지펴 올린다.
나는 다소 거창한 주제로 유럽을 얘기하고 즐겼으나, 아내는 소소하고 우연한 일상 속에서 유럽을 사랑하고 추억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콩브레의 사소한 추억 속에서 진실한 공간과 진실한 시간, 진실한 자기를 발견한다.
보리수 차에 푹 담근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든지 봄에 피는 산사꽃 향내를 통해서다. 진정한 삶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매 순간 살고 있다. 나는 예술, 사상, 철학 등 가치 있고 잘난 것으로 유럽을 얘기했지만 아내는 유럽서 느낀 우연한 감동, 감각, 충동, 욕망을 사랑했다.
내가 유럽 성당의 역사와 건축 양식을 얘기할 때, 아내는 교회 앞의 벤치에 걸터앉아 해가 기울면서 느릿느릿 변해가는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내가 사랑한 유럽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