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김소월의 인기와 지명도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단명한 탓도 있지만 나도향과의 짧은 교유 말고는 문단의 딴 이들과의 특별한 교유도 없었고. 시집 『진달래꽃』도 중학교 은사인 김억에 의해 간신히 출간되는 등, 그의 문학적 성과가 널리 알려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찍이 평안도 고향으로 내려가 말년에는 음주벽과 염인증으로 집에 틀어박혀 살면서 중앙 문단과는 더욱더 인연이 멀어졌던 듯싶다. 거의 매몰되다시피 할 뻔한 소월의 시를 해방을 맞이하여 다시 우리 문학사에 끌어낸 이가 시인 오장환이다.
그런 일을 한 이가 오장환이라는 점이 뜻밖인 건, 그는 김소월과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댄디풍의 모더니즘 시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으로 선회해 월북까지 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오장환은 처음으로 소월의 자살 설을 밝혔는데, 이후 그것은 통설로 굳어진다.
소월은 1934년 서른 두 해의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저녁 다량의 아편을 복용한 그는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한다. 소월 가족은 이러한 자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 자살자나 그 유가족이 겪는 사회적 냉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소월은 죽음을 앞두고 스승 김억에게 쓴 「차 안서선생삼수갑산운」에서 자신의 비극을 예고한다. 김억은 ‘삼수갑산’을 가고도 싶고, 보고도 싶은 대상이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소월은 그 “삼수갑산”에 갇혀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절망을 노래한다.
오장환이 밝힌 소월의 말년을 보면, 그의 아내는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반주를 함께 해온다. 어떤 때는 부인은 그를 따라 장거리의 선술집에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그러면 소월은 돌아오는 길에 대로상에서 몸부림치듯이 춤을 추고는 하였다고 한다.
소월을 자살에 이르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일단은 그의 아버지가 정신이상의 폐인이었다는 가족력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로 조부의 손에 의해 길러지면서 내성적 성격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개인적인 아버지의 부재는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대 속에서 그 의미가 더욱 복합될 수도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을 대일 땅이 있었더면」‧「나무리벌 노래」‧「옷과 밥과 자유」‧「밭고랑 위에서」 등의 시를 보면 그의 우울증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만은 아닌 듯도 싶다.
그런데 오장환은 소월의 삶에서 그의 자살 자체보다는 자살에 이르는 도저한 절망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그는 소월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끝없는 상실감을 주목한다. 특히 소월의 「초혼」이 그러한 상실감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오장환은 「초혼」이 소월 자신의 시작품에서뿐만 아니라, 1945년 8월 15일 이전 써진 조선 시 중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평가한다. 「초혼」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아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감이다.
「초혼」에서 말하는 ‘사랑하던 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시에서 중요한 건 ‘사랑하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도저히 복구될 수 없는 상태로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는 너무 넓은” 것이다.
오장환은, 소월의 자살을 “자아에게 향하여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라며 소월에게 연민과 비판을 동시에 보낸다. 오장환은 자신이 사랑한 러시아 최후의 농민시인 예세닌의 자살도 그리 생각한다. 그는 예세닌의 번역시집까지 냈는데, 이는 아마도 한국 최초의 통번역시집이리라.
예세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보조를 같이 하지만, 낯선 혁명의 현실을 쫓는 것에 숨 가빠하고 힘겨워한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러시아를 방문한 세계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 사랑에 빠졌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고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자살을 선택한다.
오장환은 소월과 예세닌의 도저한 절망에서 비롯된 그들의 시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이 결국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음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오장환 자신은 해방 후 새로운 현실을 맞아 이들을 넘어서려는 결의를 스스로 다진다. 그래서 북으로 간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