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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l 15. 2019

2001년 만추의 워싱턴디시에서

워싱턴디시를 갔던 시기는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인 2001년 11월 하순경이었다. 뉴욕 주 버펄로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한 후, 그곳에서 차를 빌려 워싱턴까지 갔다. 중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츠버그를 두르느라 다소 지체한 시간이 있기는 해도, 워싱턴까지 가는 데는 하루 종일 걸려갔다. 지도상으로 얼마 안 되는 거리 같은데 꽤 멀었다. 가는 도중 ‘워싱턴’이라는 마을 지명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그때마다 워싱턴디시에 온 줄로 잘못 알기도 했다. 미국 사람들이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진짜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디시에 감격스럽게(?)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다. 워싱턴디시! 내 친구가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어 교과서 문장에 등장한 워싱턴디시를 얼른 사전에서 찾아보고 “워싱턴 디스트릭 오브 콜롬비아”라고 읽었다가 오히려 중학생이 쓸데없는 것까지 안다고 선생님에게 장난스러운 꿀밤을 맞은 바로 그 워싱턴디시이다.  


이 시기 내가 살던 유타에는 첫눈이 내렸지만, 워싱턴에는 노란 은행잎이 푸른 포토맥 강으로 흩뿌려 떨어지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다. 도시 안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녹지 위로 갖가지 나뭇잎이 가을 색으로 물들었다가 낙엽으로 지고 있었고, 나무와 숲 주위 또는 인도 위로 사람들을 전혀 무서워 않는 다람쥐와 새들이 분주하게 먹이를 쫓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을 풍광을 배경으로 정연하게 구획된 시가지에 아테네와 로마를 흉내 낸 듯싶은 네오 클래식한 건축물들이 워싱턴을 뽐냈다. 워싱턴의 경관을 굽어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69m의 구조물인 워싱턴 기념비와(평양의 주체사상 탑은 이보다 70센티미터 더 높다고 한다. 후후~), 그것이 반사되어 드리워진 인공 연못, 링컨 기념관과 의사당 사이에 도열한 내셔널 몰의 건물들, 워싱턴은 장대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또 다르게 황홀한 도시의 풍경에 아내는 행복에 겨운 나머지 안식년을 어렵사리 선택한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 학교 총장에게도 고맙다고 해서 ‘이건 뭐야?’ 싶었다.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일 거다. 나 역시 워싱턴에 크게 기대를 안 했건만, 워싱턴은 그랜드캐년의 대자연보다 또 뉴욕 같은 도시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은 워싱턴 도시 계획을 하면서 “파리처럼 품위 있는 수도”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게다가 워싱턴이 매력적인 것은 내셔널 몰의 국립미술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품도 소장품들이거니와, 그러한 제반의 문화시설 관람이 뉴욕이나 보스턴과 달리 거의 모두 무료라는 점에서 이 도시의 방문을 한결 흐뭇하게 만들었다.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은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 파와 프랑스 인상주의의 컬렉션에서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부자나라의 미술관을 두루 돌아보면서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 말한 “돈과 영혼의 결합”이 어떠한 것인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러한 워싱턴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워싱턴은 딱딱하고 위압적인 정치 도시라고만 생각했지 이곳에서 이러한 미술품들을 그것도 공짜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을 잘 구경하고 다니다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저녁에는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시내의 노란 은행잎들도 포도에 흩날리다가는 빗길에 쓸려가기 시작했다. 워싱턴도 이윽고 겨울의 계절로 접어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밤에는 비를 피해 링컨 기념관을 둘렀다. 파르테논을 본떠 만든 링컨 기념관은 사방의 조명을 받고 장엄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기념관 중앙의 거대한 대리석 옥좌에 링컨이 앉아 있으며, 여기서 여든일곱 개의 계단을 내려가니 인공연못에는 기념관이 신비롭게 드리워져 있었다. 


비가 내리고 어둑어둑해져서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 멀리 한국에서 온 나는 느닷없이 쓸쓸함을 느꼈다. 링컨이나 제퍼슨 등을 기리는 곳곳의 장엄한 건축물들은 민주주의를 기리는 미국인들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장엄한 건물들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오만한 위용을 뽐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 주위를 대낮같이 밝혀놓은 일류미네이션의 장관은 모든 것들을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게 쓰는, 그래서 세계의 나라 중 한밤에 가장 밝은 나라가 미국임을 또다시 말해주고 있었다. 그 옛날 로마제국도 당대에는 이러한 위용을 드러냈겠지! 미국의 이러한 풍요와 번영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비가 점점 더 내리는 가운데 주차한 곳으로 돌아와 보니 차에는 갑자기 차가워진 기온으로  차창 앞뒤가 뿌옇게 김이 서려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의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방통행 길로만 돼있는 워싱턴 시내의 지리도 익숙지 않고 비는 내려 운전을 하면서 꽤 헤맸다. 그러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주위를 살피려고 차에서 내려 보니 공교롭게도 그 때로부터 두 달 전인 9월 11일 테러범들이 탄 민간 항공기가 내리 꽂혔던 펜타곤이 있는 광장이었다. 한쪽 편이 흉하게 부서져 내린 펜타곤 건물과 밤이라 주위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추워진 날씨에 으스스한 기분이 들며 워싱턴디시를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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