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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로의 안식년과 비자

by 양문규

두 번째 안식년은 미국 때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일 년 반 정도의 시간을 두고 일찌감치 준비했다. 그랬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역시 낭패를 볼 뻔했다. 첫 번째 안식년은 미국으로 갔으니 두 번째는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미국에 갔던 2000년대 초반과 달리 요즈음 유럽에서는 한국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학교 선택의 폭은 비교적 넓었다.


서유럽 쪽의 대학도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곳은 생활비가 많이 들어 진즉에 포기했다. 그래서 동구 쪽의 대학을 알아봤는데, 그쪽은 생활비 수준도 적정했지만 공산주의 시절 북한과의 학술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혹시 구경하지 못한 북한 자료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유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부 유럽 국가 중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내 봤다. 답장이 온 건 체코 프라하에 있는 카렐(찰스) 대학교의 한국학과에서였다. 단박에 온 것은 아니었고 두 번째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답신을 받았다. 늦은 이유가 나름 있었던 게, 얼마 전 헝가리 두나 강 수심이 올라가 유람선 실종자 구출이 어려웠듯이, 2013년 봄 중부 유럽에 큰 홍수가 나 프라하 시가 교통이 마비돼 학과 교수들이 내 문제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150708_190506608.jpg 카렐 대학 인문예술대 캠퍼스는 구도시 한복판에 있어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데, 이 날은 한국 관광객들로 하나 가득이다.


일단 카렐대학교 측은 나의 방문에는 긍정적이었다. 단 이 학교에 방문교수로 오면 반드시 강의를 해야 된다는 조건을 걸면서, 과거에 방문한 한국의 교환교수들이 대부분 ‘tourist’(관광객)로 왔다 갔다는 뼈 있는 말을 겸해서 했다. 나로선 강의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여행이란 일하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 가는 것이지 내내 여행만 다니려면 힘과 돈이 달려서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쾌히 수락했음에도 대학 쪽의 초청장을 받은 건 이듬해인 2014년 3월이나 되어서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체코의 대학은 거의가 국립대학으로 외국인에게 강의를 맡기면 정부 돈으로 강사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강의부담 없이 지내는 건 편한 일이긴 했어도 오뉴월 불도 쬐다 말면 섭섭하다고 이왕지사 말이 나왔던 강의를 정식으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좀 아쉬웠다. 그런데 문제는 초청장이 아니라 비자였다.


3월 중순 나는 초청장을 비롯한 서류를 갖춰 주한 체코 대사관 쪽에서 오라고 정해준 시간인 아침 일찌감치 대사관을 찾았다. 비자 관련 인터뷰를 담당하는 이를 한국인 직원들은 부(副) 대사라고 불렀는데, 그 부 대사는 ‘수리 독수리’ 같이 무섭게 생긴 체코 여자였다. 부대사는 아파서 병원을 갔다 오느라 늦었다며 사람을 꼭두새벽부터 불러놓고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는 아주 신경질적이며 속사포 같은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결론은 카렐 대학에서 보내준 이 따위 초청장으로는 비자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1년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는 대학 초청장을 제출하니 인터뷰도 없이 바로 비자를 발급해줬는데 말이다. 나는 뭔 말인지 몰라 맹하게 쳐다보았는데 수리 독수리는 이에 더 화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메모지 한 장을 ‘부욱’ 찢더니 거기다 체코어로 휘갈겨 뭐라고 써놓고는 그 적힌 내용의 서류를 갖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체코로 휴가를 갔다가 두 달 후인 5월에 돌아올 테니 그때 보자고 했다. 어이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카렐 대학에다 대사관 쪽의 메시지를 전하며 서류를 다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학과 쪽에서는 대학 국제교류 사무처에 다시 알아본 결과, 대사관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며 그 초청장은 비자를 발급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나는 맥 놓고 두 달을 기다리다가 체코 대사관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그 부대사가 대학 쪽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한다면서 나보고 반드시 자기가 요구한 서류를 해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나는 대사관에서 요구하는 서류가 정확히 뭔지 몰라 답답한 나머지 부대사가 써준 찢어진 메모지를 그대로 스캔해서 학교로 보냈다. 그렇게 메일이 오고 가기를 수도 없이 했나 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카렐대학교와 주한 체코대사관의 공방은 학교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대학 쪽에서 체코 외교부에 항의를 했고 주한 체코대사관은 곧 자국 외교부로부터 문책을 받을 거라는 연락이 왔다. 문책을 받든 지 말든지 내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비자가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고압적이던 체코대사관 쪽서 한국인 직원을 통해 나보고 하루빨리 대사관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똥끝이 타는 듯 수차례 연락이 왔다. 부대사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는데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하는 말이 자기가 써준 그 찢어진 메모지를 어쩌자고 스캔해서 보냈냐는 것이다. 그게 뭔가 크게 문제가 됐던가 싶다. 하긴 그 메모지 엄청 성의가 없기는 없어 보였다. 나야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고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새 학기 시작을 바로 코앞에 두고 비자가 나와 간신히 체코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비자가 끝까지 속을 썩였던 게, 대사관에서 결국 일 년 기간의 비자를 내주지 않아서, 체코에 가서는 비자 연장을 위해 그곳의 경찰서, 외교부니 등을 물어물어 찾아다니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사실 나야 궁극적으로는 체코에 가서 안식년을 해도 안 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일단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해외 파견근무를 신청하고 연구계획서도 제출하는 등, 제반의 행정 절차를 밟아 나갔기에 막판에 가서 일이 틀어지면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도중에 빼도 박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체코를 가게 됐기에 나는 가서 좋은 학문적 성과를 내야 되겠다는 나름의 다짐을 했다. 그랬건만 그렇게 해서 쓴 체코 관련 한국문학 논문은 그저 몇 명의 피드백이 있었을 뿐, 성과는 영 시원찮았다. 그렇게 용을 써가며 체코에 갔던 사실에 내내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프라하에 가서 살았던 그 일 년이 자기 생애 중 가장 잊지 못할 황홀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니 ‘제가(濟家)'는 한 셈이다.

KakaoTalk_20150708_190511194.jpg 위의 사진과 달리 카렐대학교 주위를 보면 역시 프라하다운 그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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