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프카와 이웃하게 된 사연

by 양문규

프라하에서의 첫 번째 숙소는 학교가 마련해준 기숙사였다. 그게 일종의 스튜디오 룸 같은 데라서, 아내와 한 공간에서 계속 서로를 쳐다보며 생활하는 게 불편했다. 그리고 혹시 미국과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 가있던 애들이라도 두르게 되면 잘 방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프라하에서 부동산 일을 하는 교민에게 부탁을 해, 학교가 있는 도심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지역의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가 이사한 동네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택지로 개발된 곳인데 처음 이사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좀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집으로 트램을 타고 오노라면 집에 도착하기 전의 3~4개 정류장 앞서부터는 도로 한쪽 편으로 회색빛 콘크리트 담벼락이 주위의 일반건물들과 뒤섞여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며 늘어서 있었다. 무심코 보면 공장 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예전에 공장이 돌아가던 곳인데 지금은 문을 닫아 공터로 놀리고 있는 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주위에 꽃가게들이 많이 있는데, 아내는 ‘서초동 꽃시장’ 같은 것이 여기도 있구나 하는 아주 기특한 생각도 해냈다.


알고 보니 그 콘크리트 담벼락은 이 지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프라하 시립 화장터와 공동묘지의 담벼락이었다. 그리고 꽃가게들은 조문객들을 위한 곳으로 양초 등의 조문 용품을 파는 곳이었다. 우리 집으로 오기 바로 직전의 세 개의 트램 정류장 이름은, 나중에 확인해 보니 ‘올산스케 묘지’ 정류장, ‘메지 묘지’ 정류장, ‘비노흐라드스케 묘지’ 정류장이었다. 우리가 하차하는 집 바로 앞 정류장 이름은 묘지도 아니고 ‘스트라스니체 화장터’ 정류장이었다. ‘hřbitovy’와 ‘krematorium’이 ‘묘지’와 ‘화장터’의 뜻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미국 살 때 주택가에 자리 잡은 예쁜 묘지들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이렇게 거대한 화장터와 묘지가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내는 크게 낙담해했다. 그리고 부동산 아저씨가 이 얘기를 고의로 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심까지 했다. 가을에 접어드니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한쪽 방 창 편으로는 묘지 비석들이 슬쩍슬쩍 보이기 시작했다.


장례식이 있는 날은 조의를 표하는 건지 대형 화로에서 불꽃이 일렁거리기도 했다. 상복을 입은 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불편했던 마음은 차차 사라지게 되었는데 체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집값만 맞으면 되지 그게 뭔 상관이냐 했다. 그도 그런 게 우리는 아파트 일층에 살아 묘지가 잘 안 보였는데, 고층에 사는 체코 사람들은 항상 묘지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0141008_100753.jpg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가려고 집 앞 정거장에서 트램을 기다리는데, 장례식이 거행되는지 화로에 불이 타오르고 한 무리의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였다.


뒤편의 네오르네상스 풍 건물은 유대인 묘지 장례식 홀이고, 앞에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카프카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우리 동네가 묘지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사 올 때부터 궁금했던 건물의 정체도 알아차리게 됐다. 우리 집에서 슬슬 걸어가면 ‘젤리브스케호’(Želivského)라는 지하철역이 있어 조금 번화한 곳이 있는데 그곳에 네오르네상스 풍의 제법 웅장하고도 멋있는 궁전 같은 건물이 있어 그게 뭔지 늘 궁금했다. 그 건물은 다름 아닌 그곳에 있는 신(新) 유대인 묘지의 장례 홀이었다. 물론 시내에는 천 오륙 백 개의 비석이 경매 부친 듯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아주 오래된 유대인 공동묘지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살던 동네의 신 유대인 묘지는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에 그 유명한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묻혀 있다.


이렇게 묘지 동네에 살게 된 덕분에 나는 지인들이 올 때마다 이 카프카가 묻힌 신 유대인 묘지를 데리고 갔다. 한 번은 후배 교수가 독일서 학술발표를 하고 이곳을 두른 적이 있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튀빙겐서 뉘른베르크를 거쳐 오는 먼 길이었는데, 프라하에 있는 나도 만날 겸 일부러 카프카의 프라하를 다시 보고 싶다고 왔기에 이곳 묘지를 데리고 갔다. 그 교수가 학문적 감동을 잘하는 편인데 이 유대인 묘지의 규모와 풍경을 둘러보고는 프라하에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몸으로 체험했다며 카프카 문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교수가 감동하는 건 이해가 갔는데, 아내의 지인인 아줌마들은 카프카 소설을 읽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이곳을 데리고 오니 굉장히 감동들을 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광객이 프라하 성 아래 카프카가 우거 하던 그의 누이의 집을 보고 가는 것으로 끝일 텐데, 카프카 묘지와 이웃해서 사는 내 덕분에 결코 관광지가 될 수 없는 이곳을 구경하고 가니 여행의 새로운 보람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라하에서 출간된, Harald Salfellner라는 의학박사가 쓴 『프란츠 카프카와 프라하』(Vitalis, 2014)라는 책에는 프라하 시내에 카프카와 관련된 서른두 군데의 장소를 소개하고 있다. 영문판도 있는데 프라하에서 살면서 이 책을 읽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육각형의 히브리어 묘비에는 부모의 이름도 함께 올려 있다. 카프카가 ‘미혼자’ 임을 얘기하고도 있는데,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한 그의 삶을 떠올렸다.

프라하 시내와 블타바(몰다우) 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비셰흐라드(Vyšehrad) 공원이라는 데가 있다. 그 공원 안의 예술인 국립묘지에 가보면 체코의 국민음악가 드보르작과 스메타나, 그리고 국민 극작가 카렐 차페크, 국민시인 얀 네루다의 묘들이 있다. 이들의 버젓한 묘들을 보노라면 이들 모두가 체코인들로부터 존경과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에 비해 카프카는 유대인 묘지에 가있고 그의 묘지를 알리는 이정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체코인들 사이에 살면서 독일어로 글을 썼던 유대인 작가 카프카의 묘한 처지를 엿볼 수 있으나, 문학의 토양은 오히려 이러한 경계와 변방임을 또다시 웅변하는 것 같다.


카프카의 일기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내 ‘고향’인 프라하에서도 그렇게 쓸쓸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지지만 나는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왔고, 추방당했다. 그러나 내 세계의 매력 또한 크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홀로 떨어져 외롭기에’ 나를 사랑한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백석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구절이 생각난다.


어두운 밤길 프라하 성 밑 누이의 집을 내려와 블타바 강의 다리를 건너 올드타운 유대인 거리에 있는 본가를 다니러 가는 카프카를 따라서 한번 걸어봤는데, 고독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이도 그냥 마음이 먹먹해졌다.




201_Franz_Kafka_und_Prag_E_9788072533039_01[1].jpg Vitalis 출판사에서 발간된 『프란츠 카프카와 프라하』 책에는 프라하 시내에 카프카와 관련된 장소 32군데를 소개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프라하로의 안식년과 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