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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오타루 무인주차장에 갇혀

by 양문규

스페인 여행에서 차 사고를 낸 이후로 나는 여행 중 운전에서 점차로 손을 떼게 됐다. 유럽에서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오니, 딸애가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휴가를 낼 때마다 아내와 의기투합하여 둘이서 자주 여행을 갔다. 그럴 때마다 나를 여행에 껴줬다. 나와 함께 여행을 하면 일단 재미가 있는데, 그 재미있는 이유가 나를 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게 여행에 큰 활력소가 된다나. 나로서는 좀 서운한 생각도 들지만 그까짓 게 뭐 대순가 하면서 둘의 여행을 쫓아다녔다.


한 번은 일본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역시 차를 빌려서 다니기로 했다. 늘 하던 대로 삿포로 공항에 도착해서 그곳서 차를 빌렸는데 처음에는 나도 좀 운전에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일본에서는 우측 운전을 한다. 아내도 렌터카 주차장에서 처음 도로로 나갈 때는 멈칫멈칫했다. 그러나 곧 익숙해져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 어렵잖게 운전했다. 반면에 조수석에 앉은 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운전을 못할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중앙선을 우측에 두고 운전하면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을 계속 하지만, 이게 운전은 안 하고 생각만 하다 보면 점점 자신감이 없어진다. 고속도로 같이 뻔한 길에서는 해보려고도 했는데, 일본차는 지시등 레버와 와이퍼 레버의 위치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있어, 차선 변경 시 그 간의 관성으로 지시등 레버인 줄 알고 작동시키면 느닷없이 와이퍼가 막 움직여서 혼비백산했다. 아내도 초반에 몇 번 그랬지만 침착하게 대응하는데 반해, 나는 내가 지레 놀라니 딸애가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운전 교체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 운전을 안 하게 됐는데, 대신 나에게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주차권을 챙기고, 차 열쇠도 챙기며 모녀가 여행하는데 따르는 제반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돕기로 했다. 딸은 구글 지도로 길을 찾고 그중에서도 이름 난 음식점을 찾아내며 식사비는 자기가 치르는 것으로 임무 분담을 했다. 이럭저럭 여행을 마쳐가던 중 차를 공항으로 반납하러 가야 하는 마지막 날에는, 삿포로에서 인천-서울 간 정도 거리가 되는 오타루 항구를 갔다. 차는 일찌감치 주차장에 갖다 놓고 시내 관광을 다녔다.


항구도시인지라 어수선한 데다가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도 몹시 불어 시내의 관광명소인 운하가 있는 곳에선 관광객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해서 아주 정신 사나웠다. 나는 모녀의 우산도 들어주고 짐도 대신 들어주는 등 나름 성의껏 임무를 다 했다. 회전초밥 집에서는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이 많아 모녀가 딴 곳으로 간 사이에 대기 번호표를 들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차례를 지키고 있기도 했다.




초밥 먹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다음 장소를 위해 주차장으로 차를 빼러 갔는데 아뿔싸 나는 어디선지 모르겠는데 그만 주차권을 분실했다. 우리가 주차한 곳은 무인주차장이라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주차장 출입구에는 통행 차단기가 떡 버티고 있어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차를 빼낼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 어떡해야 하나? 누가 차를 빼고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주차장 출입구 정산 기계 옆에 관리인과 연락하는 인터폰을 발견했다. 모녀는 화가 나있으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듯이 나보고 인터폰으로 연락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일본어를 10년간 공부했다고 하니 의사소통이 되지 않겠냐고 한다. 아니 내가 10년 전에 공부를 해서 다 까먹었다는 얘기를 어떻게 저런 식으로 와전해 들었는지 당황스러웠다. 모녀는 이러한 나를 오히려 더 황당해하다가 딸애가 할 수 없이 인터폰에다 대고 영어로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요령부득인 양 한참 일본어로 뭐라고 답변하는 소리가 인터폰으로 들려왔다. 역시 내가 알아들을 리 만무다.


공항에 차를 반납하러 가야 하는데 이거 큰 일 났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긴 한데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하나도 없다. 실의(?)에 빠져 주차장 바깥의 벤치에 털버덕 앉아 있는데 모녀가 인근의 기념품 가게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있다 나오는데 우리 같은 이들이 더러 있나 보다. 일단 최대 2천 엔을 정산 기계에 투입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기계가 주차장 개장 시간부터 계산해 출차 시간을 따져 거스름돈이 정산돼 나온다고 한다. 알고 보니 너무나 간단하고 돈도 크게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는데 그 일본어 몇 마디를 알아듣지 못해 그렇게 끌탕을 친 셈이다.


넋이 빠져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바지 궁둥이에는 벤치에 고인 빗물로 × 싼 바지같이 됐는데, 모녀는 그걸 보고는 화난 것도 잊고 또 깔깔 대며 웃어댔다. 이후 삿포로로 빨리 움직여야 했기에 딸애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오타루의 이름난 디저트 집과 세계에서 제일 큰 뮤직박스 가게라는 오르골 당은 결국 두르지를 못했다. 여행 갔다 오고 나서 며칠간은 나 때문에 그곳을 못 가봤다고 딸애가 툴툴댔다.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스스로 여행할 능력도 없이, 그저 남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무슨 재미로 여행을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을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문학, 역사 등의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된 곳을 직접 가보게 된다는 설렘 때문인지, 또 갔다 와서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즐거움에 여행을 다니는 건지. 나도 뭐라 꼭 집어 얘기하기가 뭐하다.




그럼에도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그 북쪽 섬 어디를 가나 광활하게 펼쳐진 농장들이었다. 보랏빛 라벤더 농장, 지금도 침이 고이는 멜론 시설 농장……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식물 도시 에도의 탄생』을 읽으면 이러한 광대한 풍경은 바로 에도 시대가 끝난 뒤 메이지 시대 직업을 잃은 무사들에 의해 이뤄졌음을 얘기한다. 무사들은 극한의 미개척지에서 칼을 잡는 대신 괭이질을 했고 홋카이도의 광활한 농지는 이런 무사들의 개간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나에게 여행의 재미는 이렇게 읽은 이야기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딴 얘기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이런 얘기들은 다 일본 사람의 눈으로 그리고 원예학을 공부한 사람의 관점에서만 써졌다. 홋카이도 개척사는 한편으론 메이지유신 직후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오던 아이누 사람들을 학살하고 토벌한 바탕 위에 이뤄진 것이다. 일본군은 홋카이도를 강점한 직후에는 오키나와 문제로 시비를 걸어 대만을 침략하고,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유린하면서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로의 길로 질주하게 되는 것이다.


KakaoTalk_Moim_5piqeEvGOPcY1QKQqWeGHnYH49G6Do.jpg 홋카이도의 광활한 농장은 메이지 시대 이후 직업을 잃은 무사들에 의해 개척된 것이나, 이 개척은 한편으론 아이누 사람들을 학살하고 토벌한 바탕 위에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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