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딸애가 프라하에 둘러 얼마간 같이 있던 적이 있다. 딸 역시 체코에 온 김에 우리 부부와 함께 여행을 여기저기 다녔다. 그때는 헝가리에서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프라하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큰 역으로 콜린이라는 곳이 있다. 유럽의 기차는 컴파트먼트 형식 즉 칸막이 한 객실 칸이 대중화돼 있는데, 우리도 그때 객실 칸에 있었다. 콜린에서 탄 한 청년이 우리가 있는 객실 창 밖에서 기웃거리더니만 이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순전히 이건 나의 추측이지만 아마도 젊은 동양 여자애가 앉은 걸 보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청년인데, 들어오면서 턱 재킷을 벗는 양이 자신의 체격을 뽐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우리 모녀는 객실 칸으로 느닷없이 들어온 체코 청년에게 눈길은커녕 하던 말도 멈추고 뜨악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한 자리에 있는 사람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황을 굉장히 어색해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딸애는 내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외국인과 얘기하는 걸 질색한다. 그러나 나는 아내도 인천서 서울을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말을 걸어서 만났다. 기차는 나에게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아내한테 그 시절 나의 무용담을 환기시키면 아내는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사람이 번잡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 청년에게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프라하 경제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계속해서 심문(?)하듯이 그런데 콜린에는 뭔 일로 갔다 오냐고 물으니 자기 고향이라고 한다. 고향에 자주 가냐니깐 그곳에 신학교가 있는데 부전공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다닌다고 한다. 흐음, 경제학도가 신학이라… 내가 좀 흥미를 보였더니 이번에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부전공으로 오페라 성악도 한다고 한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대화는 급속히 음악 얘기로 옮아갔다. 내가 누구 오페라를 좋아하냐고 물으니 베르디란다. 베르디의 뭔 곡을 좋아하냐니깐 뭘 알고나 묻느냐는 듯이 ‘운명의 힘’이란다. 그래서 나도 아는 척하며 그중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의 멜로디를 읊었다. 이 친구도 약간은 놀라면서 자기도 바리톤 가수 흉내를 내며 같이 불렀다. 옆에 앉은 모녀를 흘깃 보니 “둘이서 아주 잘들 노는구먼.” 하는 표정이었다.
프라하 역에서 헤어지기 직전 나는 아직 이곳에 와서 오페라를 가보지 못했는데, 그 청년에게 부탁하길 혹시 갈 기회가 있으면 내게도 연락해 같이 가자면서 이메일 주소가 적힌 내 명함을 건네줬다. 내가 하고 있는 양을 보던 딸애는 “무슨 연락이 오겠냐?”라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 ‘너 때문이라도 꼭 연락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다 다를까 프라하 ‘스테이트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셀로’를 공연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이 극장은 19세기 프라하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위해 세워진 나름 유서 깊은 극장이다. 표 사는 일로 청년을 다시 만난 날, 지하철역 노점서 초콜릿 하나를 사서 줬는데, 남자애가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는 건 처음 봤다. 나중에 딸애를 통해 들었는데 동양 아저씨가 오페라를 좋아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초콜릿을 준 건 더 신기했다고 한다. 아니 그게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건지…
그 친구와 함께 나는 아내와 딸애도 동행하여 오페라를 갔다. ‘오셀로’는 스토리 자체가 재미있고, 또 영문자막 프롬프터도 떠서 모녀는 의외로 흥미롭게 관람했다. 딸애는 아마도 오페라 관람을 난생처음 했을 텐데 그게 바로 이 프라하에서였다.
솔직히 딸애나 나나 오페라 자체보다는 극장의 스펙터클한 모습에 더 황홀해했다. 서구에서 부르주아 시대 이전 공공 대중에 대한 상징물 건축이 교회였다면, 오페라 하우스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대성당 격인 셈이다. 나는 이 청년을 통해 프라하에서 오페라 관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팁도 얻었다.
프라하의 오페라 극장은 크게 네 군데이고, 각 극장의 관람요금 등급이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데 그 등급 간 가격의 차이는 우리처럼 크게 나지는 않았다. 처음엔 그 청년이 우리 대신 표를 구입해줬는데 딸애는 학생이고, 나는 방문교수라고 말해줘 입장료의 반 정도를 할인받았다. 무대로부터 약간 거리가 있는 발코니 좌석의 위쪽이었는데, 관람료가 우리나라에서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 갈 때 정도의 액수였다. 물론 관광객이 이러한 할인 혜택을 받지는 못하리라.
이후 아내와 딸은 한 번인가 더 오페라 구경을 갔지만, 나는 기회가 되면 혼자서도 자주 갔다. 이렇게 자주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었던 데에는, 관람료도 착했지만(?), 집에서 트램이나 지하철을 타고 가서 내리면 그 앞이 바로 오페라 극장이어서 한국서 영화관 가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오페라가 오래전부터 대중화된 예술인 탓인지 부다페스트, 파리, 비엔나 등을 여행할 때는 아예 지하철역 이름이 ‘오페라 역’인 데도 보았다.
체코 청년 말로는 인구 대비 오페라 공연 비율은 프라하가 유럽 제일이라는데, 전문가가 아니라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만 공연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또 내가 특별히 선호하는 이태리 부파, 즉 희극 오페라들은 거의 공연이 안 돼 아쉬운 면이 있었다. 언젠가 체코의 작곡가인 야나체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죽음의 집으로부터의 기록>을 오페라 화한 작품을 보고 왔는데, 신선한 선율에다 연출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딱히 즐기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프라하에서 기대만큼 오페라를 즐기지는 못했다. 단 공연이 끝난 후 오페라 극장을 나올 때 프라하의 밤 풍경이 좋았다. 오월에는 이미 해가 꽤 길어져 오페라가 끝난 시간에도 아직도 푸르스름한 저녁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때 오페라 극장 앞으로 트램이 지나면, 거리의 불빛들이 프라하의 오래된 건물로 적시듯이 스미어 든다. 그러면 나는 혼자서 낯선 거리를 걸어 일부러 다음 정류장까지 가서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 비행장 활주로 같은 왕복 8차선 대로에서 황망히 버스를 잡아타던 일과는 비교가 됐다.
나는 그 이후론 오페라 청년을 만나지는 못했다. 딸애와 둘이서 만나는 눈치가 있어서였다. 언제가 둘이 프라하 밖으로 데이트를 갔다 오기도 했나 보다. 청년의 고향인 콜린 근처에 있는 보헤미아의 고도(古都) 쿠트나 호라의 ‘해골 성당’을 갔다 왔다고 한다. 해골성당이라니 괴이한 생각도 들겠지만, 그 마을은 옛 보헤미아의 정취를 흠씬 느낄 수 있어, 프라하 관광을 온 여행객이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에는 안성맞춤의 여행지다. 딸애는 체코를 떠나면서 그 청년과는 bye, bye를 한 것 같다. 딸애가 아빠 덕택으로 프라하서 오페라도 보고 체코 청년과 데이트도 하게 된 것을 고마워하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