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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한국학자 즈덴카 할머니

by 양문규

나는 체코에 있으면서 카렐대학교의 한국학과 교수들과는 막상 이렇다 할 교류를 갖지 못했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한국문학이 아닌 한국 역사, 종교, 철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었고 문학 전공 교수의 관심분야도 나와 딱 들어맞지 않아서다. 게다가 학교에 연구실이 없어서 교수들이 수업 시간 외에는 학교에 나와 있지를 않아 우정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한 만나기가 어려웠다.


내가 다녔던 인문예술대학 캠퍼스는 프라하 시 전체에 흩어져 있는 여섯 개인가 하는 캠퍼스 중 하나다. 이 캠퍼스는 관광 중심지인 시내 올드타운의 한 복판에 위치해 있어 공간이 협소하기 짝이 없었다. 여름에 도서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돌바닥 길로 여행객들이 끌고 가는 캐리어 소리가 늘 요란했다. 카렐대학교는 중부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대학인데, 이 캠퍼스가 14세기 당시 대학으로 건립되던 시기의 그 터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강의실이 턱도 없이 모자라니 학과 사무실을 강의실로 쓰기도 했다. 심지어 그 학과 사무실은 한국학과와 베트남학과의 공용 사무실이기도 했다. 처음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과장에게만 줄 조그만 선물을 준비해서 갔는데, 학과 사무실에 다른 교수들까지 모두 모여 있어서 당황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학교 어느 구석에서고 책을 앉아 볼 공간조차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당시 동아시아 학과장인 중국학과 교수가 도서실 한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줘 학교에 갈 때는 간신히 그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국학과 교수들도 이러한 상황이 민망했는지, 카렐대학교와는 별도의 기관인 동양학연구소의 한국학 도서실을 이용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다양하게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시내에서 좀 떨어진 동양학 연구소도 기꺼이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막상 동양학 연구소를 가보니 한국학 도서실에는 예산상의 이유로 사서가 없어 상시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연구소 측에서는 난감해하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한 가지 팁을 제시해줬다. 오래전 그러니까 1950년대 말부터 이곳에서 사서와 연구원으로 일하던 분이 있는데 물론 지금은 은퇴했으나 가끔씩 이곳을 두르기도 하니 이 사람과 연락을 취해 도서실을 같이 이용해 보라는 거였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던 게 1950년대 말부터 이곳에서 사서로 일한 분이라면 지금 그 양반은 노인임에 틀림없을 텐데 연구소를 아직도 나온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아니나 다를까 연락해서 만나보니 그분은 1935년생으로 우리 어머니보다 네 살 아래인 할머니셨다. 체코 여인 치고는 아담한 체격에 곱상하게 생겨 젊었을 때는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할머니 즈덴카 크뢰슬로바(Zdenka Klöslová)는 체코와 관련된 한국문학과 역사 연구에서 손꼽히는 학자였다. 더 놀라운 건 현재도 학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체코의 한국학자 즈덴카 할머니

그러고 보니 오래전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논문을 읽어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극작가인 김우진이 - 소프라노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한 바로 그 양반이다! - ‘로봇’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비교문학의 연구방법으로 밝힌 논문이다.


역사 방면으로는 일제 치하 만주와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전개된 한국의 독립운동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어떠한 역사적 인연을 맺는지를 추적한 논문들도 있다. 이 논문의 흥미진진한 내용은 국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논문의 내용을 당시 한국 주재 체코 대사가 소개했기에, 정작 연구자인 할머니의 존재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잠깐 소개하자면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소속으로 러시아에 참전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자신들을 식민지배하던 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러시아에 투항하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라는 군대를 조직한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 편에 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싸웠지만, 소비에트 혁명 이후 러시아에 적색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과 갈등 관계에 들어간다. 이후 체코 군단은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미국을 경유해 유럽 전선으로 가고자 하는데 이 이동 중에 홍범도 등의 우리 독립군 부대와 접촉을 갖고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한다. 일제와 항전한 독립군의 배후에 머나먼 나라 체코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할머니는 1950년대 교환학생으로 평양 김일성대학에 갔었다. 당시 신년 초에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의 집에 체코 유학생들이 초대받아 떡국 대접을 받은 얘기도 해줬다. 그녀의 한국말은 능숙하지 않지만, 한국어 논문 독해력은 뛰어나다. 요즘도 카렐대학교와 동양학연구소의 남북한 도서, 체코 국립도서관 고문서 자료실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다. 내가 체코 있을 당시 발표한 클뢰슬로바의 글에는, 1927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그의 일본인 부인 이방자가 일본 왕실을 대표해 체코를 방문한 행적을 당시 체코 신문과 대통령궁의 미 발굴 자료들을 통해 살펴본 것이 있다.


이 자리에서 할머니의 연구업적을 다 밝히기는 어려우나,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감동은 이제는 사서도,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평범한 할머니임에도, 그 나이가 되도록 즐거워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다. 또 건강을 위해 매일 몇 킬로씩 산책을 하는 등 절제 있는 삶을 해나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은 실증을 중시하는 그의 논문 스타일과도 아주 닮았다.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로되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많았다. 우리야 젊으니까 할머니를 초대해 저녁식사도 대접했지만, 할머니는 그에 대한 답례로 당신 혼자 사는 집 – 1960년대 초 사회주의 시절 국가로부터 받은 아파트인데 후락하긴 했으나 지금까지 쓰고 있다 –에 초대해서 자신이 손수 마련한 소박한 체코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비록 나는 체코에 가기 전 막상 기대했던 카렐대학교 교수들과의 학문적 교류에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카렐대학교의 열악한 사정으로 찾아갔던 동양학연구소에서 만난 즈덴카 할머니로부터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건지, 또 오랜 세월 공부를 해온 사람은 어떤 인품을 갖게 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올해 내가 공부하는 모임에서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책을 하나 출간코자 하는데, 할머니의 3‧1 운동과 관련된 논문을 번역해서 이에 함께 싣고자 한다. 이 일 때문에도 요즘 더 자주 할머니와 편지 왕래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 나이에 공부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비록 나는 그에 반의반에도 못 미친다 할지라도, 늘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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