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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의 누드 해변

by 양문규

나는 해외 어느 도시든 여행을 가면 꼭은 아니지만 그곳 대학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대학에 있었음에도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면 늘 마음이 설레고 지친 여행 중에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도 멀리로는 대관령, 가까이로는 나지막한 산들에 캠퍼스가 들어앉아 있고 눈앞으론 경포호수와 동해 바다가 가물가물 보이니 평화롭기가 더 말할 나위 없다.


여행 중 대학을 두르면 소소한 이득도 있는데, 카페테리아 등에서 가볍게 식사 한 끼를 해결할 수도 있다. 캠퍼스 내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을 그립게 떠올리기도 하고, 또 학교 시설들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롭다. 대학 도서관에 가서는 영어 말고는 비록 까막눈이지만 서가에 쏟아질 듯 꽂혀있는 책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뛴다.

또 여러 역사적, 문화적 인물들과도 조우하게 된다. 가령 베를린 훔볼트 대학 입구에서는 설립자인 훔볼트 형제의 동상과도 마주치지만, 대학본부 로비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는 졸업생인 마르크스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글과도 만난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박공지붕을 한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유럽을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나아가게 한 아담 스미스와 제임스 와트도 만난다. 바르샤바 대학에서는 쇼팽과도 만났는데, 그곳에 그의 아버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한 기숙사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가 배우고 가르쳤던 글래스고 대학교



그런데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캐나다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롬비아(UBC) 대학에서는 다소 엉뚱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이 대학에 있는 아시아 센터 등은 북미권에서 동아시아 연구로 명성이 나있어, 나는 안식년 당시 이곳을 가고 싶었으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밴쿠버를 여행할 때 꼭 둘러보고 싶었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니 종점이 이 대학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홍보 도우미 여학생 둘이 우리한테로 왔는데, 우리 부부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는 한국인으로 척 알아보았다.


여학생 중 하나는 싱가포르 계 캐나다 학생으로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공부한다고 했으나, 한국말 실력은 왕초보였다.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이 학생을 보니 여기서도 역시 한류 열풍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 나를 도와준 체코 여학생에게 점심을 한번 사준 적이 있는데, 엄청 좋아하면서 나보고 ‘상남자’라고 말해 좀 어이없어했다. 방탄소년단에게 ‘상남자’라는 히트곡이 있다는 사실은 귀국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캐나다 여학생이 특별히 구경하고 싶은 데가 있느냐고 물어서 그냥 캠퍼스를 구경하러 왔다고 하니, 자그만 캠퍼스 지도를 하나 주었다. 워낙 캠퍼스가 광활하기에, 학생 보고 가볼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역시 도서관, 박물관, 학생회관, 음악당 등 몇몇을 지도에다 표시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교 캠퍼스는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해안가 쪽의 한 장소를 표시해주면서 그곳에 ‘청나라 아저씨’들이 있다고 한다.

태평양이 보이는 KakaoTalk_20180714_104354020.jpg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브리티시 콜롬비아대학 정원


청나라 아저씨? 이곳이 동아시아 연구로 유명해서 청나라? 내가 요령부득의 표정을 지우니 모바일 폰에서 구글 번역 사이트를 찾더니 나에게 보여준다. ‘naked: 적나라한’이라고 돼있다. 이런, ‘적나라’를 ‘청나라’로 듣다니! ‘나체 아저씨!’ 바닷가에 나체족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주 소중한(?) 정보를 주었다면서 여학생에게 치하했다. 이런 데 다소 보수적인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거길 가볼 테냐고 물어보니 어럽쇼, 꼭 가보자고 한다.


캠퍼스 근처에 그런 곳이 다 있다니 생각하며 반신반의하면서 바다가 닿는 캠퍼스 끝까지 걸어가 계단을 타고 해변으로 내려가는데 “clothing option"이라는 안내문이 나오는 걸 보니 맞긴 맞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다가 배낭을 메고 자신의 성기를 덜렁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히피풍의 아저씨를 만났다. 나는 힐끗 아내를 봤는데 아내는 예상외로 유심히(?) 그 아저씨의 나신을 살피고 있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아줌마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해변으로 다 내려가니 밴쿠버 해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여기저기 널린 나무 등걸에 의지하여 나체의 아저씨들이 책을 읽거나 명상 내지는 휴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주변을 청소하고 있기도 했다.


아내가 다가가면 오히려 이들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 마치 자랑하는 것 같이도 보였다. 아내도 생각보다는 별 주저함 없이 이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나로서 아쉬웠던 건 여자들도 간혹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모두 수영복 차림이었다는 점이다. 허핑턴 포스트를 보니 이곳이 세계 최고의 누드비치 13개 중의 하나로, 그 해변이 엄청나게 긴 길이를 자랑하는데 이 해변에서 누드로 수영 또는 마라톤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고 한다.

나체KakaoTalk_20180714_104558137.jpg 미안한 마음으로 해변 가 멀리서 간신히 찍었다.



여행을 하면서 새삼 느낀 건, 우리 부부가 지극히 인습적 사고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밴쿠버의 차이나타운에 갔다가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리로 잘못 빠진 적이 있다. 거리에는 대마의 지린 냄새가 진동하고 입술이 푸르러져 눈이 풀리고 나른해진 이들로 가득 차 있어 엄청나게 겁을 먹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들은 서울 길거리에서 술 먹고 주정하는 취객보다도 훨씬 안전해 보였다. 그래서 이후 마약에 대한 생각을 좀 바꾸게 됐는데, 급기야는 ‘오후’라는 이의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라는 책을 일부러 구해 읽고 대오각성(?)을 했다. 확실히 여행은 새로운 개안을 가져다준다.


이와 관련돼 한 가지 얘기만 더 해본다면 프라하에서 살던 당시 도서관에서 자주 DVD를 빌려 저녁에 TV 시청을 대신했던 적이 있다. 언젠가는 DVD를 대출하러 갔더니 프랑스 판 영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눈에 띄어 얼씨구나 하고 빌려왔다. 그 직전에 프라하가 배경이 되는 밀란 쿤데라 원작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빌려보았는데, 이 영화의 에로티시즘이 프라하의 첨탑들을 배경으로 환상적으로 펼쳐져,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역시 갖가지 엉큼한 상상을 하며 빌려왔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 영화의 배우들은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고 자막은 체코어로 돼있었다. 이를테면 그림만 봐야 했다. 로렌스의 원작을 읽기는 했지만 워낙 오랜 전 일이니, 이 영화가 원작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냈는지도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건, 원작에도 등장하지만 산지기와 채털리 부인을 연기하는 남녀 배우가 벌거벗은 몸으로 숲 속을 뛰어다니다가, 산지기가 들꽃을 따서 이를 부인의 가슴과 음부에 달아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는 경험해볼 수 없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갖다 주었다. 이때 깨달은 게, 만일 이 장면이 국내에서처럼 검열로 모자이크 처리됐다면 외설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리는 게 바로 외설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했는데, 여행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상에서의 아주 조그만 일탈(?)조차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은 크든 작든 이러한 일탈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마르셀 프루스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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