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바이엘러 미술관
스위스를 이미 여행했던 아내는 스위스의 자연 풍광을 감격스러워하며 그곳에 가보지 못한 나를 꼭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남들이 다 좋다고 얘기하는 곳은 오히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약간 웃기는 인간이다. 게다가 감수성이 부족한 탓인지 자연 풍광에는 그렇게 흥취도 없어해 스위스에 대해서 그냥 시큰둥해했다. 그럼에도 오지랖 넓은 아내는 나는 물론이요 역시 스위스를 가보지 못한 딸애도 데리고 아내 본인으로서는 두 번째인 스위스 여행을 하게 됐다.
아내는 더욱이 제법 비싼 돈을 치르고 융프라우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는 그린덴발트 마을에 숙소를 빌렸는데, 그 마을에서도 거의 꼭대기에 위치한 샬레 모양의 집에서 며칠 묵었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투정을 부린 나지만 역시 스위스는 명불허전이라 막상 가서는 아내한테 고마워해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딸애도 숙소에서 아침에 일어나 뜰로 나가면 해가 떠오르면서 옥 같은 눈으로 왕관을 쓴 아이거 봉우리에 분홍색 또는 빨간색 물감이 칠해졌다가 그 물감색이 아이거 벽 전체로 번져가는 장관을 보면서 스위스의 추억을 잊지 못했다.
그럼에도 스위스의 풍광들은 워낙 여러 가지 멋진 영상으로 익숙해 있었던 터라 그냥 그것도 몇 번 보면 그저 그랬다. 오히려 여행 전 나는 스위스에 의외로 좋은 미술관이 많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스위스엔 금융 자산가들이 많아서 그런지 엄청난 부자 화상들이 많고, 그들의 개인 컬렉션이 유명 미술관이 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스위스의 자연보다는 미술관을 더 가보고 싶어, 우리가 거쳐 가게 되는 큰 도시 즉 바젤, 베른, 루체른을 중심으로 미술관을 알아보았다.
마침 브런치 카페에서 ‘hybridKIM ’이라는 필명의 건축가가 바젤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다. 이 분은 그림보다는 당연히 건축에 관한 정보를 주로 제공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가령 바젤의 팅겔리 박물관은 마리오 보타라는 이가 설계했는데 그는 강남의 교보타워와 리움 미술관도 설계해서 이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 했다. 더욱 관심을 끈 것은 렌조 피아노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바이엘러(Beyeler) 파운데이션이라는 미술관이다.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 중 하나가 모네의 대형 그림 <수련 연못>이고, 그 미술관 앞에 있는 연꽃 연못이 유명하다고 했다.
아내의 로망이 전원주택을 짓고 그 앞에 연못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모네의 수련 그림도 덩달아 좋아했다. 나는 스위스 여행을 주선하느라고 수고한 아내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바이엘러 미술관 구경이라 생각하고 스위스 여행 내내 이 미술관만 생각했다. 마침 바젤 공항을 통해 스위스를 떠나야 했기에, 떠나기 직전 그곳서 머물게 됐다. 호텔서 체크인이 끝나자 호텔 직원이 사람 숫자대로 서류 3장을 주었는데, 뭔가 했더니 일종의 관광쿠폰이었다.
그 서류를 소지하고 있으면 바젤 시내 대중교통이 모두 무료이고 모든 미술관 내지 박물관을 반값으로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융프라우를 본 것보다도 이 공짜 내지 할인 쿠폰을 받은 것이 더 뿌듯했다. 그런데 바젤에서 2박 3일을 묵지만 오롯이 있을 수 있는 건 단 하루였기에 그곳의 35개나 된다는 박물관들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래서 첫날과 끝 날은 대중교통으로 미술관, 박물관 건물의 겉모습만 구경하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가운데 날은 바젤의 박물관 중 가장 으뜸이라는 바이엘러 미술관을 작정하고 가기로 했다.
바이엘러 미술관은 시내에서 트램으로 한 30분 걸리는데 트램 정류장서 하차하면 바로 그 앞이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거대한 콘셉트와 화려한 조형의 건물이 아니라 연못을 안은 평창동의 어느 고급 저택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넓은 공간에 자연광으로 조명이 이뤄져 어느 미술관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쾌적함이 있었다. 미술관 곳곳은 바깥 자연 풍경과 연결되는데, 전시 홀로는 미술관 앞 연못물이 흘러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낳게 했다. 미술관 창문 밖으로는 담청색의 언덕, 포도원과 옥수수 밭, 방목하는 소들이 눈에 띄었다.
그림 전시도 벽에 다닥다닥 붙여 놓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모든 그림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는 양 걸려 있었다. 이 미술관에서 본 여러 작품들은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서 작가들의 작품 도록을 살펴보면서 다시 확인 작업을 해봤다. 여행 가기 전 가장 바쁜 사람은 아내이지만, 여행이 끝나고 나면 돌아와서 이런 것들을 하느라고 쓸데없이 분주해지는 이가 나다. 나는 여행 당시보다도 오히려 이때 더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바이엘러 미술관 전시실을 다니면서 계속 창밖 멀리 들판에 만개해있는 진홍색 꽃들이 무슨 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돌아와서 사진에 남겨놓은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니 양귀비꽃이 아니냐 했다. 아 양귀비꽃이 저렇게 생겼구나! 그러고 보니 색깔이 제법 고혹적이었다. 그러면서 바이엘러 미술관에서 본 모네의 그림들을 확인하다가, 불현듯이 파리 오르세 미술관서 사진으로 찍어놓은 모네의 그림들이 생각나 컴퓨터 폴더에서 다시 꺼내 보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모네의 ‘개양귀비’라는 그림이었다. 개양귀비가 가득한 들판을 양산을 든 여인과 아이와 함께 거니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화사하고 밝은 느낌의 양귀비를 그린 것 같지만 바싹 들여다보면 모네의 그림이 다 그렇듯이 물감을 찍어 뭉개 놓았다. 바이엘러 미술관 밖 들판의 양귀비꽃의 무리들도 바로 그렇게 뭉개져 아련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에 양귀비꽃이 피어있는 것이 미술관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 미술관 앞에 수련 연못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이 양귀비 들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듯싶었다.
바이엘러 미술관은,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자연의 세계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예술 또는 문화의 세계를 계속 대조시키는 듯싶었다. 스위스라는 나라는 융프라우와 같은 자연을 가졌기에 아름다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연을 문화 또는 예술과 조화 내지 대비시켜보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나라로 보였다. 여행지에 대한 진짜 이해는 여행이 다 끝난 후 돌아와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해보고 책자를 살피면서 이뤄지는 것이니, 내가 진정 좋아하는 여행은 여행이 끝나면서 이를 반추하며 다시 시작되는 여행이다.
모네의 <개양귀비>(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