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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an 05. 2020

「은세계」, 친미냐? 친북이냐?

앞서 얘기한 대로 「은세계」의 무대는 대관령 밑의 동네 강릉 금산이다. 주인공 ‘최병도’는 강릉 최 씨로 실제 강릉에서 살았던 인물로도 얘기가 된다. 그는 몰락 양반 출신이지만 강릉 인근서는 재사로 소문이 난 자다. 늘 나라 일을 걱정하던 중 1884년 되던 해, 급진 개화파의 영수인 김옥균을 사모해 서울로 가 그의 심복이 된다. 그러나 그 해 시월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이것이 실패로 끝나자 고향인 강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는 갑신정변과 같은 개혁운동이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따져본 결과, 한 나라의 개혁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 백성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은 선진 나라로 유학을 가서 문명개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그는 유학 자금을 마련코자 힘써 농사를 지으며 재산을 모아 강릉 일대에서는 큰 부자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새로 원주로 부임한 탐관인 강원감사가 최병도의 재산을 탐내 그에게 모함을 씌워 원주 감영으로 불러들인다. 최병도는 감영서 모진 고문을 받던 중 반죽음 상태로 옥에서 풀려나와 강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원주서 강릉으로 돌아오던 중 결국 대관령을 넘지를 못하고 죽어 대관령 꼭대기에 묻힌다.    


「은세계」는 탐관오리에 저항하다 죽은 최병도의 비극적 이야기를 통해 봉건 조선말 동학농민전쟁 같은 농민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가 문제적이다. 최병도가 죽은 후 그의 자식들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던 중, 1907년 조선에 일대 근대적 대개혁이 시작되었다며 서둘러 귀국한다. 1907년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해는 바로 헤이그 밀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폐위한 해이다. 그리고 병약한 허수아비 임금 순종이 즉위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정미 7 조약’이 맺어진다. 최병도의 두 남매는 이를 조선 개혁의 계기로 본 것이다. 근대적 개혁을 꿈꾸었던 급진 개화파가 어떻게 친일개화파로 변신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적 사건이라 하겠다. 


나는 이 국면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남한은 북한과 대결하고 있고 우리 주위에는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열강이 있는데 우리는 과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냐고.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이라는 외세에 또다시 속아서는 안 된다며 역시 어쩌니 해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나는 이인직이 일제의 강요라는 외적 조건 속에서 친일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의 친일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미래를 자기 방식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결과였다고 본다. 부국강병론자인 이인직은 자신이 혐오했던 수구파들을 물리치고, 그리고 이러한 수구파를 후원하는 청(중국) 또는 러시아 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역시 현재 북한과 대결하는 국면에서 중국, 러시아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고 그보다는 차라리 일본, 또 그보다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외국 열강의 도움이 아니라, 적대 세력인 북한과 어떻든지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아무리 수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꼴통 같은 행태를 보일지라도 남한은 인내심을 갖고 그를 어떻게든 껴안고 가야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학생들에게 북한 편이냐? 아니면 미국 편이냐? 하는 식의 질문 자체가 어리석고, 듣기에 따라서는 시대착오적 선동같이 들릴 수도 있다. 누구 말대로 “나와 우리는 북한과 미국 중 어느 편이 아니라 주인일 뿐이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연극협회 주최로 올라간 연극‘은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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