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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Dec 29. 2019

「은세계」와 강릉

신소설의 첫 작품은 이인직의 「혈의 루」이지만, 불세출의 평론가 임화는 이인직의 「은세계」(1908년)를 신소설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은세계」의 무대는 공교롭게도 내가 재직하는 대학이 있는 강릉이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 이 작품은 일층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에는 눈이 쏟아져 내리는 대관령이나 강릉의 이러저러한 풍광들이 그럴싸하게 그려져 작가 이인직이 강릉 사람이 아니냐는 짐작도 있어 왔다. 그러나 그의 「귀의 성」(1906)의 무대는 춘천이고, 「치악산」(1907)의 무대는 원주이니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은세계」의 주인공 ‘최병도’가 강릉에서 실제 살았던 인물로 전해지고, 「은세계」가 지금은 실전된 판소리 ‘최병도 타령’을 저본으로 삼고 있어, 이 작품과 강릉의 관련성은 유별나다 하겠다. 내가 강릉으로 간 게 1987년인데 당시 부임했을 때, 학과 동료 중 판소리를 연구하는 K선생이 있었다. 그 선생은 나와 연배가 비슷해 죽이 잘 맞았지만, 공부 욕심이 많고 그런 점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그 양반 하는 말이 강릉에 와서 맘 잡고 공부 좀 하려는데 웬 술자리가 그렇게 많은지 전혀 공부를 못하고 있다고 엄살을 떨었다. 그럼에도 늘 내 방에 와서는 서가에 뭔 새로운 책이 꽂혀 있는지, 또는 내가 뭔 새로운 책을 읽는지를 재빨리 스캔해 나가곤 했다. 


당시 K선생은 수업이 빌 때마다 어디를 매일 나갔다 오는데, 물어보면 ‘강릉문화원 일 운운’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어느 날 그 양반 방에 가보니 책상에 많은 사진들이 널려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그때서야  「은세계」의 무대인 강릉의 금산 지역을 답사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래서 무슨 성과가 있었냐고 물으니, 금산 마을에 「은세계」의 주인공 최병도 이야기를 아는 노인네가 살았는데 아쉽게도 2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고소(?)해 했는데, 단 그 노인네가 살아생전 마을 사람들에게 최병도가 살던 데라고 말해준 집을 찾았다고 한다. 사진은 그 집과 주변을 수십 컷 찍어 온 것들이었다. K선생은 사진과 소설 내용을 비교하면서 그 유사함을 설명했지만, 나는 강원도 옛 집들이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고 애써 폄하했다.  


K선생은 이 답사를 토대로  「은세계」 관련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는데, 한 신문사가 이를 보고 강릉의 이인직 문학기행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이후 K선생은 자신의 모교로 직장을 옮겨갔는데, 학계 사람들이 강릉에 올 때면 K선생 대신 내가 강릉 금산을 안내하러 다녀야 했다. 어떤 이는 이인직이 태어난 집이 강릉 어디에 있다면서 하며 오기도 했는데, 이인직이 태어난 집이 아니라 이인직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은세계」의 주인공인 최병도가 살았던, 아니 살았다고 추측되는 집이다.  


나는  「은세계」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다가, 나는 왜 막상 강릉에 와서 「은세계」의 무대인 금산 마을을 – 영동고속도로 강릉 IC 인근에 있다 - 찾아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면서 바로 이러한 점이 뛰어난 학자와 평범한 선생을 가름하는 기준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강릉에 산불, 태풍 등의 재해가 잦은데 공무원들이 피해보고서를 쓰면서 사무실 안에 편히 앉아 전화받고 쓰기보다는, 실제 현장에 가서 이를 확인하고 쓰는 것이 훨씬 정확하며 재해에 대처하는 행정 자세도 달라질 것이 아니냐는 말도 덧붙인다. 


어쨌든 강릉서 공부한 학생들은 「은세계」가 남다르게 읽혔던 것이, 언젠가 강릉 문화방송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던 졸업생이 「은세계」 관련 문학기행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방송 출연을 부탁해 난생처음 방송에 나가보기도 했다. 근데 방송 출연은 그것이 처음이자 끝인 걸 보면 나는 공부로든 방송으로든 다 시원찮은가 보다.   


<은세계> 무대, 눈 쌓인 대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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