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설의 대표 작가로 이인직을 드나, 한 명을 더 들라면 이해조, 한 명 더 들어 세 명을 채워보라면 최찬식, 네 명까지 들라면 김교제를 들 수 있겠다. 강의에는 이들을 다 다룰 수는 없어 대개 이해조까지만 한다. 이인직이 신소설 대표작가라지만 그가 작품을 몇 편 안 남긴데 반해, 이해조는 수십 편의 작품을 썼다. 이해조는 개화기 시정의 세계를 다채롭게 그려 어떤 면에서는 이인직보다 더 흥미롭다. 우리 학과의 민속을 전공한 선생님은 이해조의 「구마검」(1908)에서 벌어지는 ‘진오기 굿’ 장면이 개화기 시대의 굿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라 하는가 하면, 민요를 전공한 선생님은 「모란병」(1911)이라는 작품에 당시 색주가에서 기생들이 소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화기 시대의 잡가, 시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했다.
그중 「구마검」은 중국으로 역관을 다니며 큰 재산을 모은 중인 집안에 후처로 들어온 여인이 무당, 지관들과 한 통속이 되어 이 집안을 말아먹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무당 등이 사기를 치는 장면은 플롯을 조금만 더 보완한다면 요즘의 ‘그것이 알고 싶다’나 ‘사건 24시’의 프로그램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물론 이 작품은 사기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구마검’ 즉 마귀를 쫓는 검이라는 말뜻에 담아있듯이, 미신에 속아서 패가망신하지 말라는 미신타파의 교훈을 달고 있다. 작품 말미에는 사기의 주범인 ‘금방울’이라는 무당이 평리원(개화기 당시의 법원)에 붙들려가 징치를 당한다.
그런데 평리원 판사가 금방울 무당을 꾸짖으면서, “아따 이 년의 세력이 어지간하지 않구나. 마치 북묘 진령군만 하다”라고 한다. 황현의 <오하기문>에 진령군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임오군란 때 민비가 구사일생으로 궁을 탈출해 충주에 머물면서 한 무당과 자주 왕래한다. 이 무당은 왕비가 몇 월 몇 날에 궁으로 복위할 것이라 예언했는데 그게 그대로 들어맞았다. 왕비는 무당에게 홀딱 반해, 서울로 불러들여 북묘 사당에 살면서 진령군이라 봉하며 기도를 주관케 했다. 무당은 왕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을 따라 통증이 가라앉기 때문에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 부르고 진령군은 점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무당과 의형제를 맺고 누이라고 부르고 다녔던 이들 중에는 관찰사 자리를 꿰찬 이들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인구에 회자될 때, 민비와 진령군의 관계가 마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돌았다. <오하기문>을 다시 보면 민비는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늘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수시로 굿을 하고 어두운 밤에 사고가 날 것을 두려워해 밤에는 궁중에 전기 등 수 십 개를 아침까지 환하게 켜 놓았다고 한다. 왕비의 이다지도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용한 요사스러운 무당 진령군의 행태에서 최순실을 연상해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해조가 「구마검」에서 당시의 미신 풍조 세태를 경계한 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집안이 민비와 적대관계였던 대원군과 가까웠던 탓에, 금방울 무당에 빗대 민비 등 왕실의 미신 풍조를 은근히 비판한 일면도 있다.
이와는 약간 방향이 다른 얘기 한 가지만 더 해본다면, 「구마검」의 반(反) 미신은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합리주의에 기초한 개화사상의 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무속을 완강하게 배척하고 탄압했던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성리학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던 양반 계급이었다. 「구마검」에서 무속에 대한 멸시와 혐오는, 실제로는 조선 후기 유교 이념으로 지탱되어 왔던 봉건 조선의 체제를 위협하고 이를 뒤엎고자 했던 동학, 증산도 등의 민중종교의 발흥에 대한 양반계급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환기해보고 싶다.